17화 왠지 기분 좋은 하루

익숙한 길을 따라 카페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by AYEON

모의고사를 치던 날, 기력 보충을 하자며 모처럼 민서와 학교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민서는 약국에 좀 들르겠다고 먼저 나서고 나는 계산을 하고 뒤늦게 식당을 나서던 길이었다.


“아, 비가….”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나는 당황해 문 앞에 멈춰 섰다.


“이런, 비가 오네.”


이 목소리는-


“우산이 없나 보구나?”


내 옆에 다가선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같이 쓰고 갈래?”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우산을 가리키며 묻는다. 네, 네, 당연하죠!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가자, 다아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맙소사,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너무 가슴이 떨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자, 그럼 갈까?”


그 사람이 우산을 켜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를 재촉했다.


“안 갈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우산을 내게 살짝, 기울여 주는 걸 느꼈다. 심장아, 제발 진정해! 토독토독,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시험은 잘 쳤어?”


그 사람이 물었다.


“아, 네. 아, 아니요!”


“응? 잘 쳤다는 거야, 못 쳤다는 거야?”

“아, 잘 지치도 못 치지도….”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 사람은 조그맣게 웃었다.


“저, 그런데요, 제 이름을 어떻게?”

“이름표.”


아! 나는 교복에 달린 이름표를 힐끗 내려다봤다.


“예쁜 이름이네.”

“아, 감사합니다.”

“감기는 다 나았어?”

“네? 아, 네!”

“다행이네.”


너무 떨려서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우리는 학교를 향해 걸었다.


그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가, 반듯한 얼굴이, 기분 좋은 향기가, 그리고 그날의 빗소리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 내리던 비는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여름의 오전은 좋다. 특유의 상쾌한 냄새도, 생기 넘치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투명한 햇살도, 어쩐지 한적한 거리의 느낌도. 익숙한 길을 따라 카페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


“좋은 아침이에요.”


여느 때처럼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카페에 들어섰을 때 카페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남자는 부스스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을 줍고 있었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어제와 똑같은 남자의 옷차림에 놀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조용히 말해, 머리 아프니까.”


남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일단 가방을 내려두고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열어젖혔다. 햇살이 쏟아지자 남자는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술은 왜 마신 거예요? 혼자 마신 거예요, 그 많은 술을 전부 다?”


남자는 모은 술병들을 종이 박스 안에 담아 구석으로 박스를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전에도 말했지만, 제발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해.”라고 투덜거렸다.


“좀 쉬어요, 나머지는 내가 치울게요.”


내 말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는다. 정말 힘들긴 힘든 모양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앞치마를 둘렀다.


“한 시간 정도는 혼자 있을 수 있지?”


내가 바닥을 닦는 사이 남자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있었다. 꿀물이라도 태워줄까? 아님 약이라도 사다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도저히 안 되겠어.”


남자는 꾀죄죄해진 옷을 내려다보며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나는 카페를 나서는 남자의 등에 대고 제법 상냥하게 말했다.


“응, 다녀올게.”


그러자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 또다, 이 두근거림. 왜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 사람인데, 왜 저 남자한테 가슴이 떨리는 거지?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음성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하고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돌아보니 깔끔한 정장에 올림머리를 한 아주머니 한 분이 문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 편하신 자리로 앉으세요.”


내 말에 아주머니는 창가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나는 얼른 물과 메뉴를 준비했다.


“결정하시고 불러주세요.”

“네.”


아주머니는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연신 카페 안을 두리번거린다. 그 시선이 어쩐지 불편했다.


“저기, 아가씨.”


“네.”하고 나는 얼른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시원한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네,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그래요. 그런데 손님이 별로 없네요?”


나는 메뉴를 적던 손을 잠시 멈추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평일 아침이니까요, 저녁엔 그래도 손님들이 좀 오세요.”


흠, 하고 아주머니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커피를 내어갈 때까지도 아주머니는 카페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훑고 있었다.


“아가씨, 이 건물은 지은 지 얼마나 됐죠?”

“아, 죄송해요. 저는 잘 몰라요.”

“그래요? 전반적으로 좀 낡은 것 같긴 한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 공간은 분명히 새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 같이 정성 들여 관리하고 있어 단순히 낡았다고 말하기엔 조금 억울한 구석이 있었다.


“2층이랑 화장실을 좀 둘러봐도 될까요?”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저쪽인가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계단 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아주머니의 태도가 꼭 기밀을 빼가려는 스파이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책이 참 많네요?”


화장실까지 둘러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네.”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커피를 재빨리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어요, 아가씨.”


남자는 묘하게 기분 나쁜 아주머니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내가 그 아주머니에 대해 일러바치며 투덜대자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근처에 카페라도 차리려나 보지, 뭐.”하고.




pexels-pixabay-531767.jpg ⓒ Pixels,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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