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질투가 아니라, 그냥 좀 낯선 모습에 놀란 거예요."
“오늘 일찍 마칠 수 있어요?”
그날 오후, 우리는 땅거미가 내려앉는 거리를 바라보며 화분에 식물 영양제를 꽂아주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아니, 나 말고 그쪽이요.”
새로운 영양제 박스를 뜯다 말고 남자는 왜,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전에 저녁 사기로 했었잖아요, 그거 오늘 사고 싶은데.”
“글쎄, 그런 적이 있었나?”
“괜히 말했나 보네요, 그냥 입 닦고 넘어갈걸.”
투덜거리는 내 말에 남자는 피식, 웃는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난 또 입 닦기로 한 줄 알았네.”
“그거 알아요? 그쪽 정-말 뒤끝 있어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글쎄.”하고 시치미를 뗀다.
“어쩜 사람이 알면 알수록 더 뻔뻔해져요?”
“야, 너 지금 면전에다 대고 할 소리야?”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다진이가 두리번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다진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나를 발견한 다진이가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아는 사람이야?”
남자가 나와 다진이를 번갈아보며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내 동생이에요.”
그리고 다진이의 뒤로 귀여운 여자아이가 고개를 쏙, 내민다. 나는 두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도 영양제 상자를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를 따랐다.
“다진아, 이쪽은 나랑 같이 일하는 윤현씨.”
나는 우선 다진이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하고 다진이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남자는 손을 앞치마에 닦은 후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윤현이에요.”
남자와 다진이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쪽은 다진이의 여자 친구. 아, 이름이?”
“이세영이에요.”
“우리는 구면이다, 그죠?”
“네, 언니.”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일단 다진이와 세영이를 창가 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사이 남자는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준비해 아이들에게 내어주었다.
“동생은 누나를 전혀 닮지 않았네, 다행스럽게도.”
“무슨 의미예요, 그건?”
“얼른 정리하자. 기다리잖아, 배고플 거야.”
말을 돌리며 남자는 마감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투덜거리며 남은 영양제를 정리하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마신 유리컵을 씻어 건조기에 넣어두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나가자, 배고프지?”
그리고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우리 넷은 밖으로 나왔다.
“뭐 먹을래?”
다진이는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이번에는 남자와 세영이를 보며 물었다. 세영이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어차피 먹고 싶은 걸 말할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었다.
“글쎄. 생각해 놔. 차 가지고 올게.”
“차 가지고 왔어요?”
“응. 빨리 오려고.”
그리고 남자는 도망치듯 건물 뒤편 주차장을 향해 걸어간다. 빨리 오려고?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가?
“저 형도 같이 가는 거야?”
다진이가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지?”하고 나는 뒤늦게 물었다.
“난 좋아.”
다진이가 흔쾌히 대답했다.
“음, 뭐 먹으면 좋을까? 정말 먹고 싶은 거 없어?”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누나가 정해. 이런 건 원래 물주가 정하는 거야.”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남자의 차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창을 반쯤 내리고 어서 타라는 손짓을 했다. 다진이는 뒷좌석 문을 열어 세영이가 먼저 탈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어디에 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조수석에 타는 건 왠지 불편한데.
“야, 뭐 해?”
남자의 재촉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어디 갈지 결정했어?”
“아직요. 음, 고기 먹으러 갈까요?”
“나쁘지 않아.”
나는 얼른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혹시 맛있는 식당 알아요?”
“음, 글쎄.”
“아무 데나 그쪽이 아는 곳으로 가요!”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아 냉큼 남자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정말 무책임한 물주로군.”
남자는 투덜거렸다. 20분 정도를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호숫가 한편에 위치한 화로구이집 앞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식당 안은 술과 분위기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말소리,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 그리고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역시나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다.
“오늘이 금요일이란 걸 깜빡했군.”
종업원이 달려와 우리를 반긴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네 명이요, 좀 조용한 자리는 없나요?”
내가 물음에 종업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야외도 괜찮으세요?”라고 되묻는다. 우리는 종업원을 따라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넓고 검은 호수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어 마치 바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한결 낫네요.”
내 말에 남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뭐 먹을래? 비싼 것도 괜찮아요, 마음대로 골라요.”
“그럼 한우!”라고 다진이가 철없이 말했다. 내가 눈치를 주자 다진이는 입을 삐죽거린다.
“나도 한우.”
남자의 말에 다진이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진심이에요?”
“응.”
“정말?”
“왜, 싫어?”
비싼 것도 괜찮다고 큰 소리를 쳤으니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요, 좋아요, 한우.”
새 운동화를 사려던 계획은 당분감 미뤄야겠군, 하며 나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주문하시겠어요?”하고 종업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1번 세트로 4인분 주세요.”
내가 주문을 하려는데 남자가 끼어들었다. 종업원이 주문을 확인하는 사이, 나는 얼른 메뉴판에서 1번 세트를 찾았다. 1번 세트는 삼겹살이었다.
“이 집은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맛있어.”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남자가 그렇게 덧붙인다. 투덜대며 고개를 돌리자 다진이가 마치 아빠가 딸을 보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또 왜 실실 웃고 있어?”
“뭐야, 내 마음대로 웃지도 못해?”
“응, 웃지 마!”
“실례합니다.”하고 종업원이 숯불을 화로 안에 넣어준다. 후끈한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뒤로 젖혔다.
“주문하신 1번 세트 4인분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고기와 각종 밑반찬들을 내려놓는다. “내가 할게.”라며 남자는 집게를 들고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기 시작한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잘 먹었어요, 언니!”
“누나, 잘 먹었어.”
즐거운 저녁식사였다.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고 몇 번이나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싹싹했고, 남자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내려가는 차가 있니?”
“오늘은 이모 집에서 자고 내일 내려갈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벌써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모 집이 어느 쪽이에요?”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준 후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세영이에게 묻는다.
“아, 제가 데려다주고 갈게요. 우리 누나 좀 부탁해요, 형.”
다진이가 제법 남자답게 말한다. 기특하면서도 왠지 그런 다진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누나, 먼저 들어가.”
“으, 응. 일찍 들어와.”
나는 머뭇거리며 문이 열려있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중에 또 보자.”
세영이와 다진이가 나란히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남자와 나를 태운 차는 매끄럽게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남자가 나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내 표정이 왜요?”
“설마 동생을 뺏긴 기분이라도 드는 거야?”
이 남자는 정말 인정사정이 없다. 사실 그랬다. 내가 모르는 다진이의 낯선 모습에 왠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뭐야, 진짜야?”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이상해요, 왜 이러지?”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남자가 피식, 웃는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너도?”
“네, 네?”
“귀엽다고, 질투하는 모습이.”
“지금 놀리는 거죠?”
귀엽다니, 그런 말을!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이건 질투가 아니라, 그냥 좀 낯선 모습에 놀란 거예요. 아직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정말 다 큰 것 같아서. 벌써 여자 친구랑 누나를 챙길 줄 아는 남자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쪽은 형제가 어떻게 돼요?”
“어떨 거 같은데?”
“음, 외아들?”
“어째서?”
“그냥 느낌이?”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틀렸어요?”
내가 재촉하듯 묻자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되묻는다.
“그렇게 티나?”
나는 그만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야, 너 왜 웃어?”하고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까지 실컷 웃어버렸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맺힌 눈물을 닦으며 나는 남자에게 복수를 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그쪽도?”
“뭐, 뭐?”
“귀여워요, 그런 모습이.”
“지금 복수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요.”
나는 혀를 쏙, 내밀며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피식, 웃었다. 정말 신기해, 이 여름이 막 시작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웃는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동생이랑은 왜 따로 사는 거야? 물어봐도 돼?”
다진이의 일은 다진이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영원히 아물지 못할 상처 같은 것이었다. 가족이면서도 우리는 다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무기력함은 곧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
나는 다진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런 창피한 동생 따위는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만 내가 더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진이가 할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했어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미안, 괜한 걸 물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죠, 사실 나는 질투 따위를 할 자격이 없는 누나예요. 그때 나는 진심으로 다진이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진이만 없으면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일도, 괜히 내게 불똥이 튀는 일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다진이가 창피했어요, 그런 내가 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정말 나쁜 누나예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 남자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감추고 싶은 약점도, 잊어버리고 싶은 상처도, 말하지 못할 비밀조차도, 이 남자는 모두 꿰뚫어 본다.
“하지만 동생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너를 좋아하니까 여자 친구도 소개시켜준 거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이 남자는 비난하거나 책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남자의 그런 솔직함에 위로를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창밖으로 거리의 풍경들이 휙휙, 스쳐간다.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이 환하게 켜진 입시학원,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버스 정류장, 도로변에 늘어선 포장마차.
“참, 저녁 잘 먹었어.”
남자가 무심하게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