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선배를 사랑해요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요. 그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by AYEON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나는 커피로 손을 뻗었다. 내 앞에 앉은 남자는 이제 목발을 짚고 있지 않다. 연주의 거듭된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나는 결국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


“이런 자리, 불편하시죠?”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네, 불편해요. 솔직하게 대답할 순 없으니.

“제가 지난번에 병실에서 보고 관심이 있어서 계속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불편하시겠지만, 나와 주셔서 고마워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거짓말엔 영 소질이 없다.


“윤후 형이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에 나는 심장이 찌릿, 하고 아팠다. 자신의 이름이 영운이라고 한 남자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거라고 했다. 취미는 여행이고, 전공은 생명공학이고. 뭐, 그런 이야기들이 심심하게 오갔다. 아니, 정확히는 그 남자가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이런 자리와 만남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좀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다음에 또 만나줄 수 있어요?”


헤어지기 전, 그 남자가 물었다. 분명히 나에게 실망했을 텐데, 어째서? 예상치 못한 애프터 제안에 놀란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나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혹시 윤후 형을 좋아해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 남자?


“역시 그렇군요? 혹시나 했는데.”


나는 말문이 막혀 그저 멍청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꽤 오래 좋아한 것 같은데, 윤후 형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건가요?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자, 잘못 아셨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죄송해요.”


남자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순순히 사과를 했다.


“그럼, 이만.”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갑자기 훅, 파고든 저 남자의 공격에 나는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무례하다고 화라도 낼 걸 그랬다는 생각이 카페를 빠져나온 후에야 뒤늦게 들었다. 다시 가서 따질 수도 없고, 참.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방에서 작은 우산을 꺼내 썼다. 집으로 돌아갈 기분은 아니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집으로 가는 버스를 몇 대나 그냥 보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라고 영운이란 남자는 말했다. 겨우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한 남자도 알아차리는 그 마음을 그 사람만 모른다. 연주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줄곧 그 사람만 좋아해 왔는데.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는 짝사랑이 되어버린 후론 내내 고통스러웠다. 스스로를 동정할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로 시간만 흘러갔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내가 가려는 방향이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었다.


“다아야.”


환청이 들렸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그날 아침엔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잠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아, 보고 싶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든다. 거짓말처럼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서, 선배?”


그 사람이 우산을 쓴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여, 여기는 어떻게?”


지금 내 표정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영운이한테 연락을 받았어, 네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고.”


나는 도망치듯 뛰쳐나온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린다. 영운이란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그저 몹시 당황했을 뿐이었는데.


“아,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전화는 왜 안 받았니?”

“전화요?”


나는 얼른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온 부재중 전화가 13통.


“죄, 죄송해요. 화, 화나셨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연락은 안 되고, 갈만 한 곳에도 없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니?”


뭔가 이상하다. 그 사람이 나를 걱정했다. 그 사람이 나를 찾아다녔다. 그 사람이 나 때문에 화를 낸다.


- 어째서?


“저기, 선배, 왜 화를 내요?”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뭐라고?”


그런 그 사람의 표정은 처음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다는 표정.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선배가 왜 화를 내는지.”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가 커졌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그거야-”

“저한테 잘해주지 말아요, 선배.”


더 이상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요. 그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


“선배를 사랑해요.”


눈물이 주륵, 흘렀다. 그 사람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선배를.”




“화분에 물 줬어요?”

“아니.”

“내가 줄게요.”

“마음대로 해.”


가만히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일거리를 찾아 요즘 나는 카페를 온통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창틀이고 책장이고 구석구석의 작은 틈새까지 먼지 하나 없이 닦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햇빛을 반사시키는 반들거리는 양철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담아 들고 화분들이 일렬로 쪼르르 줄지어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물방울들이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오후의 노란 햇살과 만나 반짝거린다.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안녕, 오늘도 날씨가 참 좋지?”


나의 ‘윤후’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은 주변의 다른 화분들을 무안하게 만들 만큼 눈부신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역시 이름이 좋았던 걸까?


“오랜만에 오셨네요?”


뜻밖의 손님이 문 앞에 서있었다. “지난번엔 신세를 많이 졌어요.”하고 할아버지께서 남자의 인사에 답하셨다. 지난번에 쓰러지신 후로는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오래는 못 계세요.”


젊은 남자가 뒤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알았다.”하고 대답하셨다. 남자는 할아버지와 젊은 남자를 할아버지께서 늘 앉으시던 자리로 안내해 드렸다. 그 사이 나는 얼른 바닥에 나뒹구는 물뿌리개를 치우고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남자가 물었다.


“너는 뭘 마실 게냐?”

“커피요, 할아버지는요?”

“나는 생강차로 하마, 여기 생강차가 아주 진하고 맛있거든.”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생강차로 주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리움이 담긴 따뜻한 눈으로 카페를 찬찬히 둘러보셨다. 특히 창가에 늘어선 화분들을 유난히 한참 동안 바라보셨다. 내가 아메리카노와 생강차를 내어가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할멈이 보았다면 더 좋아했을 거요. 풀이니 꽃이니 그런 것들을 가꾸는 걸 좋아해서 항상 손에 흙을 묻히고 살았던 사람이었지.”

“네-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 앉으시던 자리에 앉아있는, 아마도 할아버지의 손자일 젊은 남자는 그런 할아버지를 안쓰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아가씨, 그때 그 노래 좀 틀어주겠소?”

“네, 금방 틀어드릴게요.”


남자는 단번에 CD를 찾아내 오디오에 넣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노래가 두 번 반복될 동안 생강차를 깨끗이 비우셨다. 그리고 젊은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와 남자는 나란히 할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문 앞까지 따라나섰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이곳에서 우리 할멈과 보낸 시간이 내게는 살아가면서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될 거예요. 젊었을 적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하지 못했지. 하지만 늘그막에 이곳에서 할멈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할멈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더 일찍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해주지 못한 게 참 후회스러웠다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햇살 좋은 창가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던 모습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늙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할아버지, 그만 가세요.”


손자가 재촉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알겠다는 손짓을 하셨다.


“아들놈이 있는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오, 아마 살아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 그곳에 가서도 생각이 많이 날 거요. 자, 됐다. 얘야, 가자구나.”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카페를 나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러브스토리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만 일하자.”


남자가 말했다. 나는 눈물을 슥, 닦았다.


“야, 너 혹시-”


남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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