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연주야?”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안녕. 차 한 잔 마시고 가도 될까?”
“이쪽으로.”
멍청히 보고만 있는 나를 대신해 남자가 연주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연주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따뜻한 물을 준비했다.
“어디 아파?”
연주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좀 앉을래?”
대신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을 뿐이었다. 나는 연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든 가고 싶긴 한데 갈 곳이 없어서.”
눈물 한 방울이 연주의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영화 속 아름다운 여배우가 우는 모습 같다고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오빠랑 헤어졌어.”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 사람의 성격상 아무렇지 않게 연주와 사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 사람과 연주가 헤어졌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충격이 컸다.
“이, 이유가 뭐야?”
연주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가 이유도 없이 그냥 헤어지자고만 한 거야?”
“응. 그런데 오빠가 헤어지자고 한 건 어떻게 알았어?”
아차, 실수다.
“그야 네가 헤어지자고 한 거면 네가 이런 표정으로 여기에 앉아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튼 넌 그냥 그렇게 헤어지겠다고 한 거야?”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째서?”
나는 연주를 좋아한다, 하지만 미워한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오답 노트처럼 이유를 파고들어 봤자 서로 더 상처만 받을 거야.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오빠답지 않았다는 거야. 며칠 전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내가 아무리 원해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들을 연주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난 연주를 좋아한다, 하지만 미워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울릴만한 여자인 연주를, 내가 되고 싶었던 ‘완벽한 여자‘를.
“이제 만족해?”
쉬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연주가 떠난 자리에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입학하고도 한참 동안 적응을 못하고 혼자 떠돌던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사람이 연주였어요. 같이 하자, 같이 가자, 같이 먹자. 그렇게 손을 내밀어주고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 연주예요.”
좋아했고 동경했다.
“정말 바보로군.”
남자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정말 미안한데, 오늘만 일찍 퇴근할게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한다아!”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그 형에게 달려간다면-”
“솔직히 없어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 따위.”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은 지극히도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
“그 사람 이외의 것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거야?”
“지금 나한텐 그 사람이 제일 중요해요.”
내 어디에 이런 단호함이 숨어있었던 걸까? 스스로도 놀랄 만큼 또렷하고 확고한 목소리에 남자도 단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난 몰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 사람이 있을 곳은 역시 그곳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수화기 너머 재인 선배는 몇 번이나 확인하듯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선배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생각보다 꽤 가파르구나, 전엔 차를 타고 와서 몰랐는데.”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으며 부지런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비밀기지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재인 선배는 적잖이 당황하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뜬금없이 이런 걸 물었으니까. 하지만 오직 내 머릿속에는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선배!”
끌릴 수밖에 없는 운명의 상대, 그 사람을 만나러 나는 이곳에 왔다.
“다아야?”
그 사람은 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아 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오면 선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를 향해 그 사람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준다.
“응, 잘 왔어.”
그리고 나무 울타리를 탁탁, 치며 묻는다.
“앉을래?”
나와 그 사람은 나란히 앉아, 오후의 햇살이 넘실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방울과 열기를 앗아간다. 그 사람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는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 달콤한 멜로디에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래, 이 노래, Say you love me,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날 그 사람의 차 안에서 들었던 노래였다. 비가 오는 거리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갔었다. 그 사람은 말없이 나를 집으로 데려다줬었다.
“선배.”
“응?”하고 그 사람이 노래하듯 대답했다. 그 사람의 맑고 하얀 얼굴이 핑크빛 노을로 물들어간다.
“선배, 혹시-”
“솔직히 말하면, 네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잠자코 그 사람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다만, 전처럼 완벽한 마음으로 연주를 대할 수 없게 돼버렸을 뿐이야. 그런 마음으로 계속 연주를 만나는 건 연주를 기만하는 거니까.”
Say you love me,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완벽하지 않은 마음이요?”
“응, 완벽하지 않은 마음.”
Please love me, 제발 나를 사랑해 주세요.
“선배.”
“응.”하고 대답하며 그 사람은 웃는다.
“미안해요.”
이제는 모르겠어, 정말. 다만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는 것.
Don‘t you know that I want to be
More than just a friend
Holding hands is fine
But I got better things on my mind
당신은 내가 그냥 친구보다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걸 모르나요.
손을 잡는 건 좋아요,
하지만 내 마음속엔 더 멋진 일들이 많은데.
You know it could happen
If you‘d only see me in a different light
Baby when we finally get together
You would see that I was right
당신이 나를 다른 방법으로 바라본다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에요.
마침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면
당신은 내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Say you love me
You know that it would be nice
If you‘d only say you love me
Don‘t treat me like I was ice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게 정말 멋질 거란 걸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
날 차가운 얼음처럼 대하진 말아 줘요.
Please love me
I‘d be yours and you‘ll be mine
If you‘d only say you love me baby
Things would really work out fine
제발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난 당신의 것이 될 거고 당신은 내 것이 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말 좋아질 거예요.
Patti Austin, Say you love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