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영업 담당자가 UX 디자인 공부를 하게 된 이야기
"왜 프로덕트 매니저(PM)에서 디자이너가 된 거예요?"
잡 인터뷰를 하거나 누군가를 처음 만나 내 이력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하다 보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듣는 질문이다. 단순히 테크 업계 PM에서 디자이너가 되는 거라고 하면 사실 물리적인 거리가 아주 멀진 않은데, 내가 영문 레주메에 PM으로 적어 둔 내 지난 커리어의 원 타이틀은 해외영업이었다. 생각보다는 큰 횡단을 했고, 이렇게 커리어 체인지를 하게 된 계기와 그 결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 비자 생활 2년, 오래 걸렸던 새로운 기회 탐방
내가 어쩌다 서른 살이 한참 넘어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고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려면 여기가 사실상의 시작점이다. 시작은 남편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게 결정이 나고, 일단 나도 퇴사부터 하고 미국에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2017년 처음 시애틀에 왔을 때에는 F2 비자(F1 학생의 배우자 비자)로 왔다. 이 비자의 공공연한 별명이 "식물 비자" 혹은 "시체 비자"인데, 돈 쓰고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학교에서 학점은행제 같이 단기로 몇 가지 과목 듣는 것 정도이고, 돈을 버는 행위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처음 막 미국에 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 호기심에 여기저기 기웃대다 내 경력과 딱 맞는 아마존 PM 포지션에 지원을 몇 번 해봤었다. 당연하게도, 취업 비자나 영주권 없이 당장 일할 방도가 없으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했는데, 미국에 와서도 나를 쓰고 싶어 하는 회사가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는 얕은 상상은 비자 문제에 대해 하나도 모른 채로 너무나 호기로웠던 것... 그렇게 친구도 하나 없이 남편이 학교에 출근을 하면 매일 혼자 집안일을 하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가장 빠르게 탈출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F1 학생 비자와 그에 딸린 OPT(졸업 후 1-3년간 일할 수 있는 제도)를 얻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사실 뭘 할 수 있는지, 뭐가 하고 싶은지 몰라서 한동안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엔 나에게 친숙하고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는 MBA를 가장 먼저 고려했었지만 결국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이미 경영학부에서 필요한 건 배웠고, 회사 다니면서도 비즈니스 돌아가는 건 더 충분히 배웠고, 그래서 내가 더 관심을 가지는 다른 분야의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케팅(브랜딩), 소비자 심리학, 통계학, 데이터, 회계 등 내가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와 실제 미국에서 외국인이 현실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으로 연결되는 학과들을 찾아보았는데, 시애틀 UW에는 내가 생각하는 프로그램이 없거나 선수과목 이수를 하기 어려워서 영 난감하기만 했다. 이때 우연한 기회에 남편의 지인의 지인이 박사학위를 진행하고 있다는 Human Centered Design and Engineering (HCDE)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학과를 알게 되었는데 - 유레카! 를 외치는 심정이었다. HCDE 석사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게 되고 웹사이트의 내용을 찾아 읽은 그 순간, 나는 무조건 이걸 해야겠다고 5분 만에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입학하기까지 1년 10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제조업 / 경영학 → IT / 디자인, 업종과 직무를 다 바꾸게 된 결정
HCDE 지원을 결심하고 SOP 원서를 준비하면서 왜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싶고 UX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지 스스로를 더 깊게 되짚어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거의 1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전 한국에서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신입사원 교육 중 냉장고 사용성 평가 동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크게 인상 깊었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래에 있는 냉동고로 허리를 굽혀 얼음을 꺼내는 게 불편하다는 점을 발견해서 상단 냉장고 섹션에 얼음 디스펜서를 개발해 넣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도 저렇게 의미 있는 제품을 출시하고 싶다는 열망에 상품기획 팀으로 옮기고 싶단 생각도 잠깐 했었다. Human-centered design이 뭔지 조차 모를 때부터 계속 관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했던 제조업 해외영업은 사실 의미 그대로의 '영업'은 아니다. 회사 내부에서 마케팅팀이라고 불린 적도 있고, 타 팀과 미팅할 때 제품 담당자라는 이름으로도 자주 불렸다. 했던 방대한 업무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담당하는 해외 시장에 나가는 모든 종류의 냉장고는 나(그리고 현지 PM)의 소관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파는 물건이 소비자에게 매력적일까를 항상 고민했었는데, 한 번씩 일차원적인 시장 조사뿐만 아니라 대만이랑 베트남 home visit(UX 언어로는 ethnographic research)도 하고,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밥은 어떤 식으로 먹는지, 그 나라의 문화부터 파고들면서 공부하는 기회가 생길 때에는 소비자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다. 이렇게 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제품 스펙을 정하고 프로덕트 로드맵을 그리는 일에 매력을 느꼈고, 실제로 내가 완전히 뒤엎어버린 캄보디아 시장 제품 라인업으로 매출이 70% 넘게 성장하고, 대만 시장에 내가 적극적으로 출시하자고 제안했던 게 2016년 우리 제품군 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어서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큰 보람을 느꼈다.
그랬지만, 제조업이라는 업종 특성상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미 만들어진 제품 스펙 중에 제일 나은 옵션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가장 적절한 포지셔닝을 하는 거였다. 내가 가장 오래 담당했던 대만 시장에는 (confidential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ㅠㅠ) 수많은 한계가 있었고, 시장에 잘 맞는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는 아픔과 답답함을 근 4년 간 느끼면서 제조업에서 벗어난 제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내 열망을 충족해 줄 수 있는 게 HCDE였다. 이 석사과정을 하면 Human centered design에 집중하고 그간 소프트웨어 제품들을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것도 해소가 될 것 같았다. 더불어 디자이너가 되면 제품의 최종 산출물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면서 내가 그린 디자인이 구동되어 소비자와 상호작용(interact)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업계를 옮기고, 새로운 직무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던 시기는 2019년 1월이었는데, 2018년 한 해는 내내 토플 공부와의 싸움이었다. HCDE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해서 토플 스피킹 26점을 미니멈 점수로 요구한다. 그런데 집에만 있으면서 영어로 말할 환경이 안 되어서 스피킹 점수 때문에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우버를 타면 드라이버랑 일부러 말을 해보기도 하고 토플 시험장에 가서는 시험 보는 다른 친구랑 스피킹 시험 직전에 스몰 챗도 했다. 결국 11월 다섯 번째 마지막 토플시험에서 필요한 점수를 얻게 되었고 그제야 겨우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보니 점수를 받아 든 순간 정말 감격스러웠다.
토플 성적을 준비하는 동안 UX 업계 리서치도 계속했는데, 사실은 알아갈수록 더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Medium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러 UX 디자이너의 글들을 읽으면서 거의 대부분이 디자인 전공자 출신이거나 혹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석사 학위라는 게 커리어 체인지를 하기 위해 하는 거라지만, 전혀 관련 없는 경영학 학부를 졸업하고 또 전혀 관계없는 업계에서 일을 한 나를 학교가 과연 뽑아주기는 할지 의심이 스멀스멀 들었다. 게다가 UW HCDE는 미국 HCI 프로그램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라 얼마나 쟁쟁한 후보자들이 많이 있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이대로 한 번에 합격하지 못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하고, 그 일 년 뒤에 합격한다는 것조차 확신을 못하니 이 늦은 나이에 다른 길을 또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 괴로웠다. 그래도 UX 공부를 하고 싶고 이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SOP를 쓰고 추천서와 레주메를 준비했다.
2019년 1월에 지원서를 냈고 3월이 발표였다. MS HCDE 외에도 보험으로 UW의 다른 1년 프로그램 MHCID도 같이 지원했었는데, 여긴 발표가 이틀 일찍 나서 불합격 통보를 일찍 받았다. 이 날부터 이러다 다 안 되는 건 아닐까 너무 무서워서 HCDE에서 어드미션 이메일을 줄 때까지 잠을 설치고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랬지만 다행히 HCDE가 나를 받아줬고! 나에게 합격증을 줬다는 건 내가 석사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정말 감격이었다 ㅠㅠ 3월 말 학교에 벚꽃을 보러 갔는데 이제 남의 학교가 아니라 "우리 학교" 벚꽃이라는 게 실감이 났고, 이렇게 어렵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하고 새 일터에 무사히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2년 간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졸업 후 테크 회사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만약 미국에 오게 되지 않았다면 30대가 되어 이런 도전을 할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이다. 매일 다니던 회사에 가고 열심히 출장을 다니며 새로운 일을 할 계기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하고 있었겠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종류의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 나처럼 전혀 다른 업에 있지만 UX를 하고 싶어 고민하고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으니 꼭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적의 솔루션을 위한 많은 고민을 거치고 그 결과물이 shipping 되어 실제 구동되는 걸 볼 때 뿌듯한 마음을 같이 느껴보면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