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대 졸업 후 공부법
통역 실력이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예요.
통대 마지막 학기 때 교수님과 선배들을 통해 자주 듣던 말이다. 그땐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졸업 후 6년이 된 지금, 이 말에 아주 깊이 공감하고 있다.
이전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통번역대학원에서의 일상은 훈련과 연습의 연속이다.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도 하루에 적게는 6시간 많게는 10시간 스터디를 한다. 통역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글과 문장을 보고 읽고 머리로 알고 있다 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무용지물. 그런데 생각보다 그게 힘들다. 분명히 아는 건데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졸업 후 프리랜서의 길을 택한 나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다. 통역 일정이 잡히면 준비를 시작하면서 관련 용어를 익히고 자료도 보며 주제 공부를 하지만 사실 일정이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공부가 되지는 않는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통역 일이 많아서 통역 기술을 계속 사용하고 연마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맡게 되는 통역 주제를 보면 학교에서 만큼 다양하게 그리고 골고루 많은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공공기관보다는 민간기업 고객이 많았기 때문에 각종 산업 관련 통역이 많았다. 경제나 금융, 외교, 남북관계 등의 굵직한 주제보다는 아주 기술적인 내용을 다루는 자리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출산 후 육아라는 변수가 더해지면서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건 더 힘들어졌다. 통역 일이 잡히면 준비하기 바빴고 그 외에 뭔가 더 깊이 파고들거나 통역 연습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첫 아이를 처음 기관(어린이집)에 보낸 게 26개월 때였으니 2년 넘는 시간 동안 일하는 시간 외에는 육아를 해야 했으니까. 이 기간에는 일도 무리해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 통역 일정이 잡히면 오랜만에 통역을 하는 거라 어색하기도 하고 퍼포먼스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고객이 컴플레인을 걸거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은 가장 잘 아니까. 뭔가 녹슬어 있는 느낌,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매 번 혼자 많이 괴로웠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아주 오랜만에 거시경제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하는 통역을 하게 됐다. 이런 주제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준비를 시작하는데 숨이 막혔다. 내가 맡았던 대부분의 회의는 기술적인 내용이라 용어나 개념을 몰라서 공부해야 했다. 반면 거시경제나 남북관계는 사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해석과 전망이 달라질 뿐 용어나 표현이 정해져 있다. 세세한 용어도 물론 중요하지만 큰 그림과 흐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주제들이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내용은 알겠는데 표현이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는 게 아닌가!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다 공부했었던 것들인데... 내 뇌 속 어딘가에 있는데... 머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바로바로 입으로 나오질 않는 것. 너무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며칠 동안 관련 기사와 동영상을 찾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으며 겨우 감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감사하게도 무사히 통역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난 꽤나 큰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다. 내가 다루어보지 않은 주제라서 모를 수 있고 어떤 산업 분야에서 아주 기술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당연히 모를 수 있다. 내용이나 용어를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 그런데 클리셰라 할 만큼 뻔한 내용이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고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통역 현장에서 대응해야 하는 통역사로서 치명적일 수 있다.
나는 상당히 낙관적인 사람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좌절감도 느끼고 자책을 하기도 했고 일종의 패배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내가 이 치열한 통역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잘하는 통역사가 차고 넘치는데 내 경쟁력은 뭘까? 10년 후, 20년 후까지 내가 통역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통역사로 살아남기 위해 통역 스터디를 시작했다. 동료 통역사와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으로 스터디를 했다. 너무 기술적인 내용보다는 다소 뻔하지만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주제와 자료를 활용했다. 경제, 금융, 교육, 정치, 국제관계, 환경, IT, 개발, 여성, 인권, 남북문제, 에너지, 도시 등 국가 차원 또는 UN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다룰 만한 굵직한 사안 위주로 살펴보았다. (통대 재학 시절에는 뻔한 이야기만 하는 연설문이나 자료가 지겨웠는데 왜 그런 자료로 공부하게 하는지 알겠다^^;)
자료를 찾고 준비하면서 용어와 표현을 익히고 시역(sight translation)을 해보면서 막히는 부분을 점검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자료 준비가 곧 내 공부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내 스터디 시간을 확보했다. 아이가 밖에서 울든 말든 문을 걸어 잠그고 집중했다. (통역사로서 퇴보하는 것 같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 그 두려움 혹은 걱정에 공감하고 내 필요를 위해 기꺼이 아이를 맡아 육아에 헌신해준 남편에게 정말 고맙다. 늘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 최고의 지원군이다.)
몇 달을 그렇게 스터디를 이어가면서 조금은 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통역 실력이 늘었다기보다는 여기저기 낀 녹을 제거하고 윤활유를 발라주니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자연스러워진 느낌. 평소에 뭐라도 읽고 쓰고 공부하니 통역 일정이 잡혔을 때 느껴지는 심리적인 부담도 훨씬 덜해졌다.
물론, 나도 파트너도 둘 다 일을 하다 보니, 그리고 육아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약속된 시간에 스터디를 못할 때도 있었고 한 주 건너뛰어야 하는 경우도 생겼지만 중요한 건 모멘텀을 이어갔다는 것. 꾸준히 해나갈 수 있게 함께해준 파트너에게 고맙다..^^ 가을 성수기가 시작되면서 스터디는 잠깐 멈추었고 이후 둘째 임신과 입덧으로 지금은 스터디를 못하고 있지만 출산 후 회복하고 다시 본격적으로 일터로 뛰어들기 전에 다시 스터디를 시작할 생각이다.
많은 것이 그렇지만 특히 공부는 나 스스로 필요를 느껴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본다. 필요는 아주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통역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뉴스를 통해 이슈가 되는 현안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개념과 용어도 끊임없이 익혀야 한다. 거기에 통역이라는 기술이 녹슬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름칠을 해주어야 한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그리고 사서 고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잘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은 일이다.
지금 비록 스터디는 못하고 있지만 오늘도 난 한국어와 영어로 뉴스를 듣고 따라 해 보고 또 기사를 찾아 읽으며 뜨거운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다. 모두 폭염 속에 건강하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