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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Sep 17. 2021

싸고 좋은 건 없습니다

돈값하는 직업인이 되고 싶은 1인




https://documentarycameras.com/how-to-make-a-documentary-film/

때는 바야흐로 2008년. 대학생 때 친구의 소개로 처음 다큐멘터리 번역 프리뷰를 하게 됐다.


번역 프리뷰는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촬영한 영상 원본 중에서 필요한 내용을 번역하는 것으로 방송 작가에게 다큐 제작을 위한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번역하는 부분은 주로 해외 전문가 또는 관계자 인터뷰다.


보통 작가님들이 한국어로 틀을 제공해주신다. 이 정리된 틀을 프리뷰 또는 프리뷰 파일이라고 하는데 몇 분 몇 초에 어떤 장면이 나오는지를 세세하게 정리해둔 것이다. 쉽게 말해 영상의 내용을 텍스트로 정리한 것. 프리뷰 파일 내에서 인터뷰 또는 번역 필요라고 표기되어 있거나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만 번역하는 게 번역 프리뷰어 또는 프리뷰 번역사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번역하는 내용이 실제 다큐 자막이나 내용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임의로 내용을 누락하거나 요약해서는 안되며 빠짐없이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촬영 원본이기 때문에 별도의 스크립트가 없고 영상을 보고 들으며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한다.


페이는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영상 1분 당 3,500원 수준으로 보통 1시간에 영상 2분 분량을 번역한다고 했을 때 시급 7,000원 정도 되는 셈. (작업 속도에 따라 개인차 있음) 당시 최저임금이 시급 3,77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번역 프리뷰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 중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때만 해도 기술이 덜 발달됐던 때라 촬영 영상은 테이프에 담겨있었다. 그래서 영상을 보고 작업하려면 방송국 편집실에 직접 가야 했다. 방송국 출입증을 받아 편집실에서 테이프를 넣고 기계를 조작해서 영상을 앞뒤로 돌려가며 번역 작업을 했다.


다큐팀에서는 번역 인력 풀(pool)을 가지고 있어서 필요할 때 의뢰를 한다. (난 한 곳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점점 다른 방송사에서도 연락이 오는 걸로 봐서 작가들끼리 서로 인력을 추천해주고 공유하는 모양.) 의뢰는 급하게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한 번 직업 하면 짧으면 30분, 길면 대여섯 시간 되는 분량을 번역하게 되고 주어진 시간 대비 분량이 많으면 여러 명이 나누어 작업하기도 했다.


환경, 교육, 정치, 역사, 과학, 기술, 음악, 예술 등 주제도 다양했다. 평소에 다큐를 좋아하기도 했고 다양한 주제를 꽤나 심도 있게 다루는 다큐 내용을 미리 보고 번역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주제가 어렵거나 익숙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찾아보며 공부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될 때도 있었지만 책임감 있게 해내고 싶은 마음에 꼼꼼하게 체크하고 넘어갔다. 스크립트가 없어서 들리는 내용만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는 부분이 종종 있었는데 그것도 꼭 표시해두었다.


각 방송사를 대표하는 굵직한 장수 다큐는 물론이고 특별기획 다큐 작업도 많이 했다. 메인으로 번역에 참여하면 엔딩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데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강의 듣고 동아리 활동하고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영락없는 대학생이었지만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학교는 용산구에 위치해 있었고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었기 때문에 당시 방송국이 모여있던 여의도와 멀지 않았다. (방송국 상암시대 한참 전의 일… 이러니까 되게 옛날 사람 같다…^^;) 그래서 일이 잡히면 방송국으로 향해 눈 빠지게 영상 보며 번역하고 새벽에 택시 타고 귀가하는 날도 많았고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 방송사 본부를 모두 방문하게 되었다.


희귀 언어의 경우 짝을 이루어 작업하는 재미도 있었다. 한 번은 핀란드에 관한 다큐 영상에서 핀란드어로 된 인터뷰를 번역해야 하는데 문제는 핀란드어를 한국어로 번역 가능한 사람이 없었던 것. 그래서 다른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핀란드 여학생과 내가 짝이 되어 그 친구가 핀란드어를 영어로 옮겨주면 내가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이중작업을 같이 진행했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꽤나 긴 분량이라 같이 직업 하면서 친해져서 그 친구가 한국에 있는 동안 같이 밥도 먹고 놀러도 다니는 사이가 되었고 지금도 SNS로 연락을 주고받곤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방송국을 들락날락 거리며 번역하면 다음 달에 한 달치 작업 분량이 계산되어 내 통장으로 입금되는데 대학생 용돈벌이로 아주 쏠쏠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보니 의뢰와 작업 방식, 과정이 프리랜서 통역사/번역사와 똑같다. 어쩌면 난 그때부터 이미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이 좋고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다 보니 번역 프리뷰 일을 4년 가까이했고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면서 그 일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의뢰 연락이 올 때면 나는 이러이러해서 안될 것 같고 필요하면 다른 사람을 추천해줄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친동생과 대학원 동기, 이후에는 후배들을 추천하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연락이 온다! (사실 13년 동안 꾸준히 연락이 오고 계속해서 나를 찾아준다는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 다소 만망하지만 실제로 몇몇 작가님은 나처럼 꼼꼼하게 잘 작업해주고 따로 손볼 곳 없이 제작을 편하게 해주는 분이 없다며 이번 건을 꼭 내가 작업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며칠 전에도 의뢰 문자를 받아서 작업 가능한 몇 명을 소개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페이가 13년 전과 똑같다는 사실…! 최저임금이 8,720원이 된 2021년에도 번역 프리뷰에 대한 페이는 그대로다.


방송 업계가 박봉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서 순간 혈압이 오르고 속이 상했다. 번역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다큐를 제작할 수 없고 팩트가 매우 중요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알바 수준의 일거리로 여기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전문가 수준의 번역이 아닌가 보다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학생 때 했던 번역 프리뷰 일을 지금 전문 프리랜서 번역사로서 받는다면 어떨까? 솔직히 전문 번역사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리 까다로운 일은 아니다. 이유는?


1. 일반 영상 번역은 자막처리를 위해 글자 수 제한을 두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줄여서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프리뷰 번역은 글자 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내용만 정확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기 옮기면 된다. 글자 수 제한을 두지 않는 건 엄청난 자유다!


2. 그때에 비해 번역 노하우도 실력도 늘었다. 통역도 번역도 기술이라 하면 할수록 는다. 그리고 빨라진다. 특히 번역은 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같은 시간 내에 많은 분량을 끝낼 수 있다. 쉽게 말해 내 작업 속도에 따라 시급이 달라진다.


3. 동시통역 기술을 활용하면 더 빠른 작업이 가능하다. 어차피 스크립트도 없고 인터뷰, 즉 구어체이기 때문에 말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내용이 너무 기술적인 게 아닌 이상 동시통역으로 해볼 만하다. 영상 속 음성을 들으며 동시통역을 하고 통역 음성을 텍스트로 바꾸어주는 앱을 활용해 한국어 텍스트로 된 결과물을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 음성인식 오류가 난 부분 그리고 말로 하는 통역으로 인해 문장이 조금 지저분한 부분만 수정해주면 되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작업할 수 있다.


4. 이제는 100% 재택으로 가능하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작가님들은 번역해야 할 영상을 파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방송국 편집실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내 방에서 작업이 가능해진 것. 이동 없이 재택으로 모든 작업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건 프리랜서에게 큰 장점이다.


5. 문제는 페이다. 국내 주요 통번역대학원 통번역센터 번역 요율표에 따르면 영상을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비용은 1분 당 20,000원~40,000원 수준이다. 스크립트가 없을 경우 전사(transcription) 비용으로 1분 당 10,000원을 별도로 청구하기도 한다. 프리뷰 번역의 난이도를 고려해 최저 요율로 책정한다 해도 차이가 크다

걸 알 수 있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일을 받지 않는 건 5번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조건이 맞지 않아서. 페이는 방송사 내규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올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대적으로 정책을 손 보지 않는 이상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서비스 제공자, 즉 번역사의 결정에 달렸다. 이 조건으로는 일할 수 없다면 또는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선택도 그에 따른 책임도 본인의 몫이다.)


통역도 번역도 마찬가지다. 업계에서 정해진 표준 요율이 있지만 실제로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받는 돈은 천차만별이다. 속된 말로 요율 ‘후려치기’도 너무 많다. 고객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받기 원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그레이 시장(gray market)’이 형성된다.


사실 누군가를 추천하거나 소개할 때도 페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대학생이나 통번역대학원 재학생, 방송 쪽에 관심이 있거나 아직 경력이 많지 않은 초년차 프리랜서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에도 의사를 밝힌 지인 몇 명을 조심스럽게 추천했다.




https://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743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를 중시하는 시대. 여기에도 ‘가격 대비’라는 조건이 붙는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성능이 괜찮고 만족도가 높은 것이지 절대적인 별 다섯 개는 아니다. 그리고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품질이 떨어지거나 아쉬운 부분도 넘어갈 수 있는 것. (제 값 주고 산 물건이라면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바로 콜센터에 전화해서 따지지 않는가.)


의뢰인도 알았으면 한다. 싸고 좋은 건 없다는 사실을. 서비스 제공자에게는 의뢰인이 제시하는 조건을 이유로 일을 거절할 권리가 있음을. 그리고 요율과 서비스 퀄리티(품질)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맞아줘야 의뢰인에게도 어느 정도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할 권리가 생긴다는 사실을.


나도 소비자 혹은 이용자 입장이 되었을 때, 특히

누군가의 전문적인 기술로 서비스를 받을 때에는 가성비보다는 전문 기술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다고 생각하고 돈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할 때도, 스피커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부품 하나 교체할 때도, 고장 난 가전제품 A/S 받을 때도. 내 기준에서는 ‘저거 하나 바꾸는데 왜 이렇게 비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거 하나’ 바꾸는 걸 내가 할 수 없고 기술과 전문성을 요하는 것이라면 그 기술과 전문성을 가진 이들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믿고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대신 해당 전문가가 일을 확실하게 하고 내가 낸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게 해 주기를 기대하겠지.



https://www.macmillandictionaryblog.com/language-tip-of-the-week-to-make-someone-feel-satisfied

통역과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는 전문가로서 가성비 좋은 통역사 혹은 번역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고객 입장에서 가격 대비 괜찮은 서비스 말고, 비록 돈은 들어도 그만큼 좋은 품질의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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