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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Oct 01. 2021

악덕 에이전시 걸러내기

통대 졸업 후 첫 동시통역




통번역대학원 졸업은 했는데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날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당연하지. 경력 많고 유능한 통역사가 전국에 얼마나 많은데 검증되지 않은, 이제 갓 졸업한 햇병아리 통역사를 굳이 부를 이유가 없지 않나.)


남는 게 시간이었던 그때, 난 틈만 나면 통번역사 카페와 구인 사이트 등을 기웃거렸다. 대부분 풀타임으로 일하는 상근직을 뽑는 공고였는데 딱히 지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없었다. 프리랜서로 마음을 정한 건 아니었지만 마음 가는 곳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프리랜서 번역사와 통역사를 모집하는 에이전시 공고를 보게 되었다. 당장 일을 주는 건 아니지만 등록을 해두면 일이 생겼을 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이 중 한 곳에서는 연락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놀랍게도 정말 딱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이게 웬일?) 신기하고 감사했다.




며칠 후 그 에이전시에서 통역 일이 있다며 전화가 왔다. 삼성 계열사에서 열흘 동안 진행되는 ERP 사용자 교육에서 동시통역과 위스퍼링 통역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순차통역은 경력이 좀 있었지만 동시통역은 전혀 경력이 없었던 터라 나한테 기회가 온 게 믿기지 않았다. 분야가 많아서 여러 명의 통역사가 참여한다며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파트를 나누고 고객 측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사전 미팅을 한다고 했다.


사전 미팅에는 고객과 에이전시 담당자, 그리고 나를 포함해 7명의 통역사가 참여했다. 프로젝트 개요를 듣고 궁금한 걸 물어보고 파트를 정하는데 첫날은 모든 파트가 한 자리에 모여 교육을 듣고 나머지 9일 동안은 파트별로 나뉘어 실습하고 심화 학습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그래서 첫날은 정보전달 위주라 동시통역으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위스퍼링으로 한다고 하셨다.


첫날 동시통역으로 진행되는 전체 교육은 나와 다른 선생님이 파트너로 함께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통대를 졸업하고 동시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 선생님뿐이었고 다른 선생님들은 송수신기를 활용하여 순차통역을 했다고 한다.) 함께한 파트너 선생님은 당시 3년 차 프리랜서이셨고 난 졸업 후 첫 동시통역이라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후 동시 파트너로 몇 번 더 만났고 작년에는 지방 출장까지 함께하며 재미있게 일했다. (추억이 방울방울^^)




이 프로젝트 통역은 어려웠지만 (쉬운 통역이 있기는 한가?) 재미있었다. 부스에서 하는 동시통역도 좋았고 송신기를 들고 하는 위스퍼링 통역도 다이내믹해서 좋았다. 2주 동안 강남에서 화성까지 출퇴근하는 게 힘들긴 해도 2년 동안 대학원에서 배운 기술을 실제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정요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요율로) 돈 받고 통역하는 게 그저 좋았다.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프로젝트 잘 마무리되는 듯했다. 이제 남은 건 비용처리.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없다. (에이전시다 정책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은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달 10일, 15일, 말일 등 정해진 날짜에 비용처리를 해주는 식이다.)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물어보니 다음 주에 처리해준다고 했다.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 그 후로 몇 번 더 이런 식의 전화와 답변이 이어졌고 그렇게 또 한 달이 흘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전화도 되지 않았다. 담당자가 휴대폰 전화를 받지 않은 데 이어 회사 전화마저 없는 번호라고 했다. 회사 주소를 찾아보니 당시 내가 살던 곳과 멀지 않아서 직접 찾아가 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무실이 텅 비어있었다.


멍해졌다. 나 돈 떼인 건가. 당한 건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같이 일했던 분들 몇 명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서 상황 설명을 했는데 동시통역 파트너로 함께했던 선생님께서는 에이전시에서 몇 달 뒤에 돈 주는 건 흔한 일이라고, 일단 기다려보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다고 하셨다.




나도 이 업계에 몇 년 몸 담아 보니 슬프게도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는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뭐가 됐든 연락을 취하고 내가 받아야 마땅한 것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계속 전화를 해댔다.


몇 날 며칠 전화를 건 끝에 드디어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사무실로 전화했던 날은 마침 사무실 이전으로 이사를 했던 날이라 전화가 안됐던 거라고. 그간 사무실을 다시 세팅하고 정리하느라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다고.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태라 그 말이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나한테 중요한 건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일주일에 한 번, 2주에 한 번 연락해서 비용은 언제 처리되냐고 물었고 계속 다음 주, 다음 달, 이런 식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은 지 일 년이 다 되어갈 무렵 담당자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계속 미뤄졌던 것이라며 다음 달에는 꼭 입금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입금이 됐다.




나중에 일하면서 만난 선배 통역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에이전시는 악덕 중에 악덕이라고 했다. 보통 그렇게 경력 없는 초년차 프리랜서를 프로젝트에 투입시키고 돈을 떼어먹는 수법을 쓴다고 했다. 심지어 회사명도 바꿔가면서 말이다. 그 선배도 한 건에 대해 못 받은 돈이 있어서 소송까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액수는 얼마 안 되지만 괘씸해서라도 꼭 받아내야겠다며…


그렇게 비용 처리 안 해주고 피하고 미루고 하다가 일했던 통역사가 지쳐서 또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피곤하게 뭘 매달리나. 그냥 먹고 떨어져라 하는 생각으로 놓아버리면 그 에이전시는 그 돈을 그렇게 꿀꺽하는 것. 난 다행히 끈질기게 매달려서 내가 받아야 할 돈을 늦게라도 다 받아냈다. 하지만 회사가 마음먹고 막말로 ‘먹튀’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에이전시 중에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 에이전시도 많다. 쉽게 말해 중개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떼는 곳. 보통 통번역대학원 산하에 있는 통번역센터도 일종의 에이전시인데 이 센터 중개수수료가 15% 정도다. 재학생 때는 사실 이것도 많이 뗀다고 생각했는데 시장에 나와보니 15%면 정말 훌륭한 것이었다. 20, 30, 40%까지 떼는 곳도 있다.


요율이 너무 낮으면 둘 중 하나다. 애초에 고객사와 에이전시가 계약할 때 낮은 요율로 계약을 했거나 계약 자체는 정요율로 했는데 에이전시에서 너무 많이 떼어먹거나. 어느 경우이든 바람직하지 않기에 낮은 요율의 일은 피하는 편이다.




시장에는 무수히 많은 에이전시가 있고 모든 에이전시를 다 파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업계 특성상 일할 때마다 계약서를 쓰고 일하는 것도 아니라서 사실 ‘을’ 입장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런 취약점을 악용하는 나쁜 기업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정직하게 중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곳도 (많지는 않아도) 분명 있다. 초년차 프리랜서라고 무조건 이력서를 뿌리는 것도 비추고 경력이 없다고 해서 숙이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고 본다. 나는 자격을 갖춘 통번역사로서 그리고 에이전시는 고객사와 통번역사를 연결해주는 중개자로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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