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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Dec 29. 2020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




2월 말, 회사를 그만두자 바로 백수가 되었고 동시에 통번역대학원(이하 ‘통대’) 입시생이 되었다.


나는 이미 통대 입시에서 낙방한 경험이 있었고 입시학원에서 수강생들의 통역에 충격을 받아본 적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난 내가 바로 종합반에 등록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천천히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초급반에 등록했다.


1-2분 길이의 영어 뉴스를 듣고 한국어로 요약하는 걸 연습하는데 왜 그리 길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들을 땐 분명히 다 알아들은 것 같은데 내 입으로 요약하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발표 공포증 생길 뻔...ㅠㅠ


그래도 요약 통역이라 얼마나 다행이에요. 완벽하게 통역하는 건 어렵지만 핵심 메시지를 뽑아 논리적으로 엮어내는 거라면 가능해요.


선생님이 해주신 이 말씀에 조금 과감하게 요약해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4월까지는 초급반에서 자신감을 좀 붙이고 익숙해지는 시간으로 갖자는 마음으로 따로 스터디를 하지도 않았다. 주 2회 학원 수업을 듣고 나머지 시간에는 혼자 수업 자료 복습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저녁에는 운동하며 정말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통번역은 생활 속 모든 게 공부가 되고 자료가 되기 때문에 딱히 잘못한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대체 뭘 믿고 그런 여유를 부린 건지^^;


나름 마인드 컨트롤해가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러다가 5월에 슬럼프가 왔다. 공부가 힘들어서는 전혀 아니었고 (공부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관계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기도 했고 당시에 한국에 가족이 없을 시기였는데 마침 난 자취생활에 지쳐가던 때였다. (집 떠나고 싶어서 스무 살 때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는데 자취 6년 차가 되니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통화하고 바로 비행기표를 끊어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 입시생이 공부는 안 하고... 하지만 이 상태로는 공부도 못하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한 달 정도 가족과 함께 지내며 잘 먹고 쉬고 돌아왔다.




학원 선생님과의 상담 시간. 올해 입시를 볼 계획인데 아직 종합반을 듣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셨다. 7월부터 바로 종합반을 신청해서 듣기 시작했고 이미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 동안 특훈을 받아온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또 자신감을 잃어갔다...


하지만 입시를 보려면 맞서 싸워야 했다. 뭐가 됐든 듣고 이해한 걸 이야기해야 했다.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고 세 달 동안 정말 집중했다. 주제별로 표현 익히고 입으로 내뱉는 연습을 (혼자) 끊임없이 했다. 그간 너무 사람들에게 치여 살아서 그런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 수업도 혼자 듣고 혼자 공부했다. 그때 스터디를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지금 결과도 난 만족스러워서 후회가 되진 않는다.


10월 입시철이 되어 스터디 안 하고 있는 학생들을 모아 선생님께서 짝을 지어주셨다. 남은 기간은 무조건 스터디를 해야 한다며... 그때 만난 몇몇 친구들 중에 한 명은 나랑 동갑이었고 마음이 잘 맞아 입시가 끝날 때까지 스터디를 쭉 이어갔고 1년 차이가 나긴 하지만 통대 동문이 되었다.




당시 두 곳의 통대에 지원하여 시험을 봤고 그중 한 곳에서 입학성적우수 장학생으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세상에!) 사실 입시 준비하면서 아쉬움도 있었고 시험을 잘 쳤다는 자신감도 없었던 터라 재수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포함하여 주위 선배 통역사들은 합격했으면 일단 가라고 입을 모았다. 통대 합격이 자격증처럼 앞으로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거면 모를까, 대학원 가서 2년간 또 공부하고 졸업까지 해도 보장되는 게 없는 현실이라는 것. 학력을 위해 시간을 더 투자하기보다는 일단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빨리 시작하고 졸업해서 경력을 하나라도 더 쌓는 게 중요하다고, 1년이라도 빨리 진학해서 졸업하고 경력을 쌓으라고.

졸업 후 5년이 흐름 지금,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찬성 또 찬성이다. 가고 싶은 학교가 있다면 최선을 다하되 그 학교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혹시 통대 입학을 앞두고 고민하고 계신 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합격통보를 받은 곳이 있으면 일단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녀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시 반수를 하더라도.




입시를 준비하면서 내 안의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내 실력에 대한 신뢰도 없었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 것 같고. 그래서 사실 시험 당일에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미래의 내가 말해주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가서 입이라도 뻥긋하고 오라고. 단어 몇 개라도 내뱉고 오라고.


난 엉덩이가 가벼워서 진득하게 앉아 공부하는 것도 잘 못하고 머리가 대단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암기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찾아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큰 성취였다. 물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참말로 무시무시한 진짜베기 통대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설명충 ‘ㅡ’

Q. 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대를 졸업해야 하나요?

A. 우리나라에는 통역사를 위한 공인 자격증이 없다. 즉 자격증이 없어도 통역사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 통역사로 일하고 싶다면 통대를 추천한다. (번역은 이야기가 좀 다를 수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동시통역을 하면서 만난 동료 통역사 중에서 통대를 졸업하지 않고 일하는 분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샤론 최 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통대 나오지 않아도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순차통역 잘할 수 있고 그런 분들 의외로 많다. 하지만 동시통역은 이야기가 다르다.)  통대는 전문대학원으로 분류된다. 통역이라는 기술을 가르쳐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는 곳이다. 특히, 동시통역은 철저한 고도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기술인데 통대가 아니면 제대로 배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또, 통대에서는 통역뿐 아니라 통역사로서의 소양과 자세, 통역 준비법 등도 함께 훈련하고 배우기 때문에 전문 통역사로서 필요한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곳이다.


요약: 통역을 업으로 삼는 전문 직업인, 소위 말하는 ‘프로(페셔널)’가 되고 싶다면 추천! 그 외에는 필수 아님!


이만 설명충 퇴장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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