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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Dec 30. 2020

초경량 엉덩이를 가진 자, 통대생 되다

치열하고도 행복했던 2년




첫 통대 입시 낙방 후 2년 간의 회사생활, 그리고 짧게는 3개월, 길게는 7개월 간의 입시 준비 끝에 입학하게 된 통번역대학원! 사실 부족한 점 투성이었만 내 안의 가능성을 봐주신 교수님들께 그저 감사했다. 진심으로.


애초에 최고가 되겠다 혹은 1등을 하겠다는 욕심은 내려놓았고 그저 백지상태에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성실하게 해 봐야겠다는 다짐으로 첫 학기를 시작했다. 한 가지를 꾸준하게 진득하게 하는 성격이 못되고 가만히 앉아서 뭔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경험하는 걸 좋아하던 나는 보통 생각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초경량 엉덩이를 가진 내가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결코 만만치 않은 통대생활을 가감 없이 파헤쳐드리겠습니다! (TMI주의)





* 전 학기 공통사항 *


모든 학기 수업은 20-21학점 정도. 통역과 번역 수업, 언어 숙달, 한국어, 그 외 교양수업 한두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통 한 기수에 정원이 40-45명 정도 되고 네 반으로 나누어 한 반에 10명 조금 더 되는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 (교양수업은 한영과 동기들 전체 혹은 다른 언어 전공 동기들이 다 같이 듣기도 한다.)


[ 통역 수업 ]


통역 수업은 한영과 영한으로, 그리고 순차와 동시 수업으로 나누어진다. 매주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학생들이 돌아가며 연사 역할을 한다. 연사는 주제에 맞는 텍스트(주로 연설문)를 준비하고 실제로 수업시간에도 연사 역할을 맡아 준비해온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준다.


순차 수업의 경우 학생들은 연사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노트 테이킹을 한다. 교수님 재량에 따라 짧게는 3분 길게는 8분 정도의 길이로 자르고 지목된 학생은 다른 학생들 앞에서 공개 통역을 한다. 그리고 교수님은 그 학생의 통역을 공개 크리틱 하신다. 잘못 나오거나 빠진 내용, 잘못된 표현이나 문법 오류 등을 잡아주신다.


동시 수업은 보통 2학년부터 진행되는데 순차 수업과 비슷하지만 연사가 말할 때 통역사는 부스 안에서 통역하고 밖에서 수신기를 통해 통역을 들어야 한다. 때문에 교수님은 학생 서너 명의 통역을 조금씩 들으시고 크리틱 하신다. 대신 수업마다 랜덤 하게 학생들이 짝을 이루어 서로 통역을 들으며 크리틱 할 내용을 메모하고 수업 후 전달하는 일종의 피어 리뷰(peer review)를 진행한다.



[ 번역 수업 ]


번역 수업도 마찬가지로 한영과 영한으로 나누어지고 학기마다 경제, 기술, 미디어, 법률 등 주제가 있다. 교수님 재량에 따라 수업 방식은 다양하지만 보통 텍스트 하나를 번역 과제로 주고 수업 전까지 번역을 메일로 제출한다. 그러면 교수님이 랜덤으로 한 학생의 번역을 화면에 띄워두고 다 같이 그 번역을 크리틱 하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해당 번역문은 익명이고 내 번역문일 때 나만 귀가 빨개진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표현이나 문법 오류, 오역 등을 찾아내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내가 한 번역을 제시하며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묻기도 한다. 생각보다 학생들은 정말 적극적이고 다른 학우들의 의견이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 언어 숙달 ]


매주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주제 심화 수업이다. 학교마다 과목명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수업이 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통역도 번역도 언어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는 시간.


예를 들어, 미 대선이 주제라면 일단 대선 관련 기본 용어와 표현을 찾는다. 단순히 명사만 찾는 게 아니라 대선 관련 수식어나 관용구 등의 표현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용어와 표현이 실제로 문장으로 어떻게 쓰였는지도 함께 찾는다. 그리고 그 주 발표자는 미 대선에 관한 개괄을 한국어로 발표한다. 미 대선 일정과 진행 방식 등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이후 교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설명해주시고 교수님께서 가져오신 대선 관련 영어 지문을 문장 구역 해보며 내용과 표현을 익힌다.


사실 준비도 수업 자체도 가장 힘들고 어려웠는데 이 수업이 통역사가 되어 통역 준비를 하는데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수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유익한 수업이다. (준비 또 준비만이 살 길이다!)


[ 스터디 자료 및 수업자료 준비 ]


수업을 제외한 시간에는 혼자 복습하고 과제하고 스터디 자료를 만들고 스터디를 한다. 과제는 위 세 가지 수업 준비에 교양 수업에서 에세이 쓰기나 영어 발표 준비하기 정도가 더해지는 정도이다.


스터디 자료 및 수업자료는 보통 연설문으로 활용한다. 국제기구나 각국 정부 연설문은 잘 정리된 좋은 문장의 글이고 현재 이슈가 되는 주제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통역 주제로 다루기 좋다. 이 외에도 Ted나 세바시, 각종 특강 등 강연 스크립트나 인터뷰 전문을 활용하기도 한다. 통역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구어체 문장으로 된 게 좋다. 문어체는 문장이 깔끔하고 좋기는 하지만 통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문어체로 된 글을 자료로 활용할 경우에는 편집 작업을 통해 구어체 문장으로 만들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대통령 연설문처럼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로 되어 있는 자료도 있지만 대부분은 둘 중 하나만 있기 때문에 내가 번역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단순 번역이 아니라 통역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며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료를 준비할 때 나도 그 자료로 문장 구역을 해보며 막히는 부분이나 표현이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 부분을 표시하고 고민했다. 사실 대부분 비슷한 곳에서 막히기 때문에 내 경험을 공유하며 나는 이렇게 생각해봤다며 옵션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파트너가 잘한 경우에는 나도 그 표현이나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만큼 스터디 자료를 준비하는 데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보통 일주일에 순차 한영 자료 1개, 영한 자료 1개, 그리고 동시 스터디 개수만큼 한영과 영한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다. 그렇게 공들여 만든 자료를 여러 명의 스터디 자료로 일주일 정도 활용해야 하는데 파트너 A가 나와 스터디를 하고 파트너 B와 스터디를 할 때 내 자료를 써버리는 일이 생겼다. 내가 파트너 B와 스터디할 때 내가 준비한 자료를 이미 해버려서 정말 난감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자료에 날짜를 기록해서 이 날 이후에 써달라고 부탁했다.


[ 스터디 ]


스터디가 통대 생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하루에 네 시간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특히 스터디를 강조하는 분위기여서 하루에 스터디만 8시간씩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의 스터디는 주로 2인 1조, 동시의 경우 4인 1조로 동기들과 함께하는 스터디를 말한다.


스터디는 보통 2시간 단위로 잡고 한영 2 꼭지, 영한 2 꼭지 정도 커버한다. 순차는 한 꼭지 당 4-5분 정도, 동시는 7-10분 정도 길이로 한다. 스터디 파트너와 번갈아가며 연사와 통역사 역할을 하고 서로 통역을 듣고 바로 크리틱 해준다. 아침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 1시간짜리 스터디를 하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서 등 돌리고 앉아서 한 시간 내리 문장 구역만 하는 스터디도 했다. (이건 혼자서는 안 하게 돼서 서로 좋은 의미에서 감시하는 목적으로ㅎㅎ)



스터디는 파트너와의 약속이니 웬만하면 스터디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빼먹지 않으려고 했다. 스터디 파트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좋은 자료를 찾아 충분히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 읽어주고 또 도움될만한 생산적인 크리틱을 해주려 애썼다. 서로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기!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스터디룸 한 곳이서 종일 보냈던 날.



[ 셀프 스터디 ]


말 그대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다. 한국어와 영어 신문 소리 내어 읽고 이슈와 키워드 익히기, 한국어 및 영어 뉴스 섀도잉, 수업자료 복습, 문장 구역, 내 통역 녹음 후 듣고 받아쓰며 셀프 크리틱(복기)하기 등이 포함된다.


난 개인적으로 한국어 동사 활용이 약해서 한국어 신문기사에서 동사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읽었다. 그리고 연사가 말하는 시간 대비 통역이 길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서 통역이 속도를 좀 붙여보고자 한국어와 영어 뉴스 섀도잉을 매일 20분씩 했다. 이 두 가지가 나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 세 번의 방학 ]


4학기 말에 졸업시험이 있으니 통대생에게는 총 3번의 방학이 허락되는 셈이다. 하지만 통대생에게 방학다운 방학은 없다.


방학은 스터디를 원 없이 하고 인풋을 늘릴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채워야 한다. 영어 표현을 익히거나 노트 테이킹을 집중 연구해서 내게 맞는 방법을 찾는다거나 말랑말랑한 생활영어를 공부하는 등 방학 때 하나의 테마를 정해서 집중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 모든 걸 소화하기 위해서 아침 8시에 등교해서 학교 문을 닫는 밤 11시에 하교했다. 장장 15시간을 꼬박 학교에서 보낸 것이다. 컨디션 난조로 혹은 기분이 다운돼서 일찍 학교를 벗어난 날도 없지 않았지만 가능하면 이 시간을 지키려고 애썼다. 초경량 엉덩이를 자랑하는 내가 좀 무거워져 보겠다고 몸부림을 친 것이다.


물론, 이런 스케줄은 학교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기도에서 왕복 네 시간씩 걸려 통학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대단... 나는 어차피 자취 중이었기 때문에 합격통보를 받고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학교와 집이 너무 가까워도 게을러질 것 같아서 운동 겸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집을 구해 너무 덥거나 추운 날을 제외하고는 걸어 다녔다. 이 시간에는 공부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로 재미있는 팟캐스트나 신나는 음악을 들었다.




1학기.


사실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메일을 통해 과제가 주어졌다. 사자성어와 속담, 국정과제, 주제별 용어사전을 외우고 학기가 시작되면 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구구단처럼 쿡 찌르면 바로 답이 나올 정도로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했다. 출력해두고 조금씩 보기는 했지만 결국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해서 외운 건 시험 날짜가 잡히고 나서였다. (대학원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이러나저러나 벼락치기구나^^;)


한 번 시험 볼 때 봐야 할 단어 또는 표현 개수가 3000개 정도였고 그중 100개가 시험문제로 나왔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100점은 아니어도 외워지긴 하는 게 신기했다. 물론 단기 암기력은 꽝이라 너무너무 괴로웠지만...ㅠㅠ (그리고 실제로 통역사가 되어 통역 준비를 해보면 단기간에 방대한 양의 자료를 보고 익혀야 하기 때문에 이런 훈련이 필요했던 것...!)


1학기 내내 외우고 시험보고를 반복했다.


첫 학기에는 정확한 이해와 전달을 위해 영영 영한 요약도 연습하고 순차통역에 필요한 기본적인 노트 테이킹 기법을 배운다.

* 노트 테이킹은 단순히 빠르게 연사의 말을 다 받아 적는 것이 아니다. 연사의 말을 들으며 내용을 기억하게 쉽게 정리한 후 통역할 때 노트 내용을 되짚어가며 복기해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정해진 규칙은 없으며 기호와 구성 등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찾아야 한다. 그래서 같은 문장을 듣고도 사람마다 기호도 노트 방식도 다르다. (노트 테이킹 관련 내용도 추후 별도로 자세히 포스팅해볼게요!)


매주 시험 보고 매주 크리틱 받다 보니 한 학기가 다 갔다. 그래도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너나 할 것 없이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2학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새 마음으로 2학기 시작. 그런데 생각보다 통역이 잘 되지 않았다. 노트 테이킹도 엉망이고 한국어도 꼬이고 영어도 꼬였다. 내 모국어가 뭔지 혼란스러워졌다.


교수님들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사전 준비 제대로 안 해가서 혼나고 숫자 다 틀려서 혼나고 내용 못 알아들어서 산으로 가는 통역 해서 혼나고... 혼이 쏙 나가게 혼나고 나면 정말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그냥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학교에 갇혀있는 게 괴로운 나날이었다.


2학기 때부터 동시통역 입문 수업이 추가됐다. 반마다 담당 교수님에 따라 수업 방식이 달랐는데 우리 반의 경우 동시통역 입문 수업 때 문장 구역을 했다. 문장 구역이 동시통역이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문장 구역 연습 효과를 톡톡히 본 케이스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 문장 구역은 sight translation이라고도 하는데 텍스트를 눈으로 보며 통역하는 것을 말한다.


3학기


본격적으로 동시통역 수업이 시작된다. 순차통역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동시까지 더해지니 멘붕이다. 동시통역 초반에는 귀와 뇌와 입이 따로 작동하는 걸 연습하기 위해 숫자를 100부터 거꾸로 소리 내어 세면서 연사의 이야기를 듣고 한한 요약하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난이도를 더해 숫자를 2 또는 3씩 빼가면서 하기도 한다. 뇌 부하를 더하면서 정확하게 이야기를 듣고 전달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엉망이다. 숫자를 잘 이야기하면 내용을 엉뚱하게 듣고 내용을 잘 들었다 싶으면 곳곳에 숫자 계산이 잘못되어 다 꼬여있다.



동시통역 부스에서 헤드폰을 끼고 밖에서 연사가 하는 말을 듣고 통역한다.


실제로 영한 한영 동시를 해보면 대략 난감이다. 한국어와 영어는 문장 구조가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에 그대로 듣고 문장을 만들기란 불가능이다. 짧은 문장이면 몰라도 문장이 길어지면 끝까지 듣고 동시통역하는 건 불가능이다. 그래서 영한도 한영도 문장을 쪼개서 통역하는 법을 배운다. 일 년 동안 계속 문장 쪼개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동시통역이라는 게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심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방학 때는 동시 스터디 시간을 늘렸다.


여기에 텍스트의 난이도도 점점 높여갔다. 숫자가 쏟아져 나오는 지문으로 폭탄을 맞기도 하고 개념이 어려운 금융 지문에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다양한 나라 사람들의 억양과 발음에 멘붕을 겪기도 하고 말이 무지무지 빠른 미국인 연사의 말에 허덕이기도 했다. 또, 좋은 게 좋다 식의 뻔한 내용의 연설문 말고 정말 내용을 예측하기 어렵고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는 강연 등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해도 해도 어렵고 맨날 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괴로웠다.


그리고 대망의 4학기, 통대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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