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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Oct 27. 2020

마라톤을 완주한 적 있는가

101일간의 여정 1주차

이직을 준비하던 차에 뻔하게 시간을 보내기 싫어 고민하다 결성하게 된 모임이 있다. 각각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1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매일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한다. 아마 혼자였으면 의지박약이 도져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느슨한 룰을 정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모임장으로 절로 책임감이 들어 1주차를 잘 마무리했다. 추후에 구성원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매거진을 발행할 예정이다. 공동 매거진 시작은 일주일 뒤가 될테지만, 내 답변을 먼저 기록해보려 한다. 이 기록이 101일동안 잘 이어지길 바라며.



101x10 1주차 질문


1. 나는 죽어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가끔씩 자다 몸서리를 치며 깰 때가 있다. '나는 언젠가 죽을텐데, 죽음 뒤에는 뭐가 있지. 엄마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그 상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나는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애써 죽음이라는 생각을 지우며 다시 잠에 든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간의 유한함 안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갈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그런 것 치고는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고 있지만) 나는 죽음을 내 의식 속 아주 깊숙이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어차피 원치 않아도 결국엔 맞닥뜨릴 죽음인데 굳이 상기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처럼 죽음도 우리 곁에 그렇게 머물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나이는 아니지만 한 해가 지날 때, 숫자의 앞자리나 뒷자리가 바뀔 때 원치 않아도 죽음의 발자국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서른을 맞이한 해가 그랬다. 나는 벌써 삶의 3분의 1을 살았구나. 어쩌면 이미 반 정도는 산 것일지 모른다. 노인의 하루는 느리게 흘러가나 행위에 비례한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행동도 느려지고 사고도 느려지는만큼 20대였다면 하루 만에 해낼 일이 하루 혹은 며칠은 걸리지 않을까. 벌써부터 체력이 후달리고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20대의 젊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무언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분명히 죽어가고 있다. 점점 죽음의 가속도가 가팔라질테다.


얼마 전 엄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말했다. 모든 세포가 깨어있던 시절의 영민함을 잃어가고, 몸이 삐그덕대는 나날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엄마는 그럼에도 죽음을 말하기보다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다고 말했다. 삶은 유한하니 자신에 대해 더 깨우치고 모든 감각을 열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자고. 명상도 꾸준히 하라는 말은 늘 그렇듯 함께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육체가 죽어가고 있음과 달리 내 정신은 온전히 살아감에 집중하고 있다. 모든 행위의 중심축은 죽음이 아닌 삶이다. 살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맛보고 깨우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하루, 한 달, 일 년,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 너머를 계획하고 상상한다. 그 상상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지향적인 소비에 관심을 갖고 환경 문제에 분노하는 나, 더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노력을 떠올리면 나는 상당히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대한 분노, 인간성에 대한 비관은 희망을 끊임없이 갈구함에서 비롯된다. 나의 삶만이 아닌 다음 세대와 동식물이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돈 때문에 사람들이 컨테이어 벨트에, 용광로에 삶을 마감하지 않기를. 가장 아름다운 행성인 지구가 지구다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차피 올 죽음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죽음을 저 뒤로 밀어 두고만 싶다.(언젠가는 어떤 죽음이 좋을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내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다.



2. 나는 어떤 집에 살고 싶은가


나에게 집은 늘 욕망의 대상이다.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이 갖고 있는 의미, 권력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퍼스티지’, ‘써밋’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 아파트에서 혹은 한남동 같은 부촌의 빌라에 사는 것이 성공한 인생의 척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내 속 안의 다른 욕망이 꾸물거릴 때가 있다. 인간은 지구에 하등 유익한 점이 없으니 내가 물질적인 것을 쟁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도시의 소음을 뒤로한 시골에서의 고요한 생활을 원할 때도 있다.


상경하고 나서 처음 찾은 보금자리는 대학 근처의 작은 원룸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고향에서 함께 서울로 올라온 친구와 아파트를 얻게 되면서 한층 널찍한 공간과 아침이면 눈이 부시는 채광의 시간을 즐겼다. 별안간 후미진 동네가 싫어 삼성동의 투룸 빌라로 이사했고, 취직하고 나서는 마포의 원룸으로, 그리고 다시 도보로 통근이 가능한 여의도의 꽤 널찍한 오피스텔로 옮겨 다니며 철새처럼 살았다. 주거의 형태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한 번도 내 마음속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더 큰 공간이 필요하다. 요리를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주제에 깔끔한 주방을, 욕조가 있는 욕실을, 쏟아질 것 같은 책을 담을 서재를 욕망한다. 그러나 어렸을 적 호기롭게 ‘30대엔 멋진 커리어우먼이 돼서 서울의 야경을 담은 멋들어진 집에 살아야지’ 외쳤던 욕망은 거세되어간다. 어쩌면 이렇게 철새처럼 사는 삶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번진다. 치솟는 서울의 집 값과 서울을 떠날 생각이 없는 나의 의지는 그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집은 현실과 가장 가까이 마주한 곳인 동시에 점점 가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 욕망을 거세하고 싶지는 않다. 넓은 집에서 반려묘에게 좀 더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할 수 있기를, 평생을 함께할 가족들이 개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기를, 공원이 가까워 아침에 조깅을 할 수 있기를, 집안 가득히 식물들을 키울 수 있기를, 가끔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초대해 왁자지껄하게 어울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침이면 쏟아지는 햇볕을 마주하며 눈을 뜨고, 늦은 밤이면 혼자서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하루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집이기를 바란다. 이러한 욕망은 나를 무력하게도 만들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더 열심히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간 자체의 물리성만큼 함께하는 사람이 살고 싶은 집을 완성하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달리 유대감이 강한 우리 가족은 갑자기 집이 쫄딱 망해 단칸방 신세가 된다 해도 ‘우리 넷’이 함께라면 시답잖은 것에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 같다고 말한다. 원하는 집을 갖게 되지 못하더라도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욕망의 충족은 충분히 변주가 가능하리라 믿는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사랑이 변질되지 않을 최소한의 방어막을 제공하는, 그 사랑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이 내가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이다. 그래도 어차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중이니, 집 안에 잔디가 깔린 테라스가 있고 한강이 거실 너머로 보이는 널따란 한남더힐을 꿈꿔본다. 그러다가도 소로우가 살던 월든 호숫가의 소박한 통나무집을 떠올려보기도 할 것이다. 욕망하나 그 욕망에 잡아 먹히지는 않도록.


3. 마라톤을 완주한 적 있는가


나는 원체 끈기가 없는 인간이고 하나의 행동을 꾸준히 하는데 젬병이다. 일을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여러 가지를 펼쳐 놓고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마라톤 대회가 성행하고 있지만 참가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앞으로 마라톤 완주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을 열렬히 바라지만 그 범주에 마라톤은 아마 계속해서 없을 것이다.


본가에서의 무료한 휴식 동안 가장 그리웠던 공간은 한강이었다. 지금은 남는 것이 시간이니 그 시간을 좋아하는 공간에서 유익하게 보내자는 마음에 회사를 다닐 때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러닝을 시작했다. 한강에서, 여의도공원에서 조금이라도 달리고 나면 그 자체로 뿌듯함이 남는다. 거지 같은 폐활량과 지구력 덕분에 2분 남짓 달리고 나면 5분은 걸어야 가빠왔던 숨이 제 상태로 돌아온다. 다리가 너무 아파올 때면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전속력으로 달려도 본다.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전속력으로 짧은 거리를 달렸을 때와 일정 속도로 꾸준히 달릴 때를 비교해보면 전자가 압도적으로 내게 즐거움을 준다. 내가 인생을 살아온 ‘결'과도 비슷하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빨리, 효과적으로 나오는 방식을 선호했고 그 결과가 느리게 나올 때는 늘 조바심을 냈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목표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또래 동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승진했다. 그 당시에는 벅차올랐다. 누구보다 빨리 그 자리에 올랐고, 국회에서의 비서관이라는 자리가 갖고 있는 무게와 권한 또한 내가 염원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들을 잠시나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전속력 달리기는 승진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리에 대한 무게감을 내가 버텨낸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 5년이라는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나니 다시 뛸 열정과 에너지가 모두 소진돼버렸다.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목표치가 꼭 최단일 필요는 없었다.


오래달리기는 어떤 식으로 달리느냐가 중요하다.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달렸다간 뒤에 가서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도 있다. 빠르게도 달렸다가 또 그 템포를 낮추기도 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늘 전속력으로 달려왔던 나는 퇴사 후 한동안은 누워있었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걷기 시작하는 단계다. 다시 잘 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막판 스퍼트가 필요한 때에는 모든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 조급함은 뒤로하고 나의 페이스를 만들고 싶다.


마라톤은 아니지만 목표가 생겼다. 3km 남짓한 여의도공원 한 바퀴를 쉬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다. 여자 육군 기준 특급이 15분이라고 하니, 나는 못해도 20분은 잡아야 할 것 같다. 보통은 nct의 misfit을 들으며 달리는데, 늘 마크가 랩하는 부분에서 멈춰서곤 한다. 답변을 쓰느라 노래를 들어보니 1분 36초쯤이다. 2분도 채 달리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표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3분 36초의 노래를 6번 들을 동안 계속 달리는 거리. 여의도 공원을 쉬지 않고 완주할 그날을 기대하며 나머지 5곡의 노래를 채워보아야겠다. 어쩌면 완주 플레이리스트에 노래 몇 곡이 더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유난히 파랄 때, 붉게 물든 나무들을 마주할 때, 강아지를 마주칠 때 잠시 속도를 줄이는 달리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4. 당신은 천직을 찾았는가


천직 대신 내가 꿈꿨던 직업들을 복기해본다. 우주비행사, 요리사, 외교관, 공연 기획자, 한의사, 검사, 앵커, 종군기자, 시인, 소설 작가, 정치인 등등. 재밌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이거나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원했다. 대다수의 꿈들은 내가 그 직업에 필요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거나 그 직업을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할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빨간 줄을 긋거나 유예했다. 장래희망은 수없이 변했지만 한 가지 뚜렷한 방향은 있었다.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을 주는 일을 하는 것. 공익을 좇는 것. 내 목소리를 내는 것. 그 가치가 충족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직업을 갖느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여차저차 나는 공익을 추구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국회에서 소위 일 잘하는 보좌진을 규정하는 몇 가지 자질에도 부합하는 듯했다. 야마가 있는 글을 쓰는 것,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문제점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언론 보도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것 등등. 굵직한 아젠다도 끌고 나갔고, 흙탕물이 튀기는 정치판에서 어떨 때는 발을 빼기도, 어떨 때는 어그로를 끌기도 하는 정무적 판단도 나름대로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밤낮없이 이어지는 일과 너무나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 상식 이하의 직원들, 수준 이하의 국회의원들에 질려 나는 남의 일을 대신하기보다 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국회 일이 나의 천직인가,라고 물었을 때 80%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퇴사 소식을 들은 국회 동료나 기자들은 너만큼 이 판에 잘 맞는 사람이 어딨냐는 말을 건넸다.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정치판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능력들이 더 중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발굴해내고 판을 벌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들. 그리고 이면은 의원을 위한 일일지 몰라도 표면적으로는 공익을 다루는 일.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동시에 그 일에서 충만함을 느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으나 폐쇄적이고 곪은 조직문화는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 오죽하면 구글에서도 퇴사 이유 1위가 직장 동료이겠는가.


직업을 천직으로 삼는 시대는 저물어간다. 어쩌면 살면서 하나의 직업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아주 러프한 기준만 세워놓고 이직을 결정했을 때, 두 번째 직업을 정하는데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한 가지에 전문성을 가지기보다는 다양한 것들에 그리 깊지 않은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국회는 그런 점에서 나와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다양한 현안들을 다루고, 분야의 경계 없이 오갈 수 있었다. 민간 영역은 달랐다. 금융이면 금융, 환경이면 환경, 전문분야를 바탕으로 사업을 구축해 나간다. 에너지와 열정을 모두 쏟아붓고 싶은 특정한 분야를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일의 조건들을 적어보자 추상적인 가치 혹은 업무 환경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직업’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좀 더 추상적인 의미에서 천직을 찾았을지 모른다. 첫 번째 직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환경에서 가장 최상의 아웃풋을 낼 수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무능력함과 인성이 부재한 상사를 청부업자를 고용해 퍽치기라도 하고 싶다, 라는 생각까지 발전하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식과 인사이트가 있는 동료들과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가능하고, 의사결정을 할 때 나의 의견이 반영되는 일.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가치관이 기저에 깔려있고, 목표를 세우면 저돌적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일. 새로운 일을 계속해서 창출하고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일. 더 나아가서는 그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일을 절대적인 기준에서 잘한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할 때 나 자신이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천직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직 두 번째 직장에 발을 내딛지는 못했지만, 또 그곳에서의 일이 나와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지의 어딘가에서 나의 천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나아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직이 아니면 어떠랴. 나는 n잡러로 살고 싶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일들이 존재하고 경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넘쳐난다. 100점짜리가 아니더라도 재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유예했던 꿈들을 이뤄갈테다.


5. 막차를 쫓아가듯 열정을 쫓아간 적이 있는가


'막차를 놓치면 택시타고 가면 되지’하는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막차를 타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막차가 공덕행이라 공덕에서 한 시간 넘게 집까지 뚜벅뚜벅 걸어간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인 듯하다. 어쩌면 100% 노력했는데 실패할 경우를 지레 겁먹고 방어기제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막차가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라 비행기라고 가정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테다.


나는 열정적인 인간이다. 다만 그 열정이 매우 빨리 타오르고 사그라들어 문제일 뿐이다. 가끔, 아니 자주 용두사미를 의인화한다면 그게 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구상했던 프로젝트들, 친구와 함께 푼돈이라도 벌어보자며 계획했던 사업들, 개인의 발전을 위해 목표했던 수많은 행동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미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열정을 불태운 적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정말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경험은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 인생에 순도 100%의 열정이 있었던가. 아직 나는 마지막 항공편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야 할 때가 왔는데도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게 또 있을 거야’ 하며 도망가버릴까 봐.


어차피 우리는 단 한 번에 길을 찾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막차를 쫓아가듯 열정을 쫓는 것보다, 막차를 놓쳐도 포기하지 않는 힘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미련할지 모르지만 얼마가 될지 모르는 거리를 걸어서 가는 뚝심. 한 번에 가지 못한다면 이리저리 우회하고 환승해서 결국 종착지에 다다르는 유연함과 지구력 같은 것들 말이다.


막차를 쫓아가듯 모든 걸 걸고 달려갔는데 막차를 놓치면? 그러다가 다시 달릴 에너지가 남지 않아버리면?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불꽃이 언젠가 때를 만나면 활활 타오르리라 믿는다.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주춤할지 몰라도, 결국엔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정이 모두 소진되고, 설사 아름다운 불꽃이 아닌 까만 재만 남더라도 의연하게 다시 심지를 돋울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길.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 열정이 언젠가는 열렬한 연애로 불타오르길 바래본다. 일에서는 충분히 나를 열정의 연료로 삼아 달려왔던 경험이 있으니까. 내일은 없을 것 같이 나를 기꺼이 내던지는 경험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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