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같은 사람 노무현
여는 말: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10명이 써 내려갈 101일간의 여행기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매우 설렙니다. 101개의 글이 모두 채워지는 그날까지 열심히 글을 써보려고요.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기를.
기억할 만한 장례식에 갔는가, 엄마의 엄마를 기억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써 내려갔다. 나와 피가 섞이고 가장 가까우며 사랑했던 사람 중 떠나보낸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할 것이다.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2009년 5월 23일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억되는 날일 것이다. 노 대통령의 서거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한 달에 한번 집에 보내주던 지독한 기숙학교였다. 마침 23일은 5월의 마지막 주말이었기에 나는 그때 학교가 아닌 본가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뒤 처음 접한 뉴스는 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었다. MB에게 정중히 인사하던 문재인을, 거리를 잔뜩 물들이던 노란 물결을, 화장터 너머로 사라진 그를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정치외교학과로 진학을 꿈꾸며 공직에서 일하리라 마음먹었던 10대 소녀에게 노무현은 우상이자 다시없을 대통령이었다. 그의 공적인, 개인적인 흠결을 떠나 그의 비전은 시대를 앞서갔고 반짝거렸고 여전히 우리가 이뤄내지 못한 것들로 가득했다. 따뜻한 말로, 가슴 뛰는 말로 사람들의 가슴에 그의 비전을 씨앗처럼 뿌리고 함께 싹을 틔워나가자고 외치던 사람. 솔직함, 진정성, 대담함, 따뜻함. 그 어떤 권력자도 보여주지 않았던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탄핵됐을 때,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친구 문재인이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던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뭣도 모르는 19살의 나는 그의 죽음을 떠올리며 한동안 숨죽여 울었다. 그를 비난하는 다른 반 친구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49재 하루 전 날 친구와 함께 학교에 거짓말을 하고 몰래 봉하마을로 향했다. 당연히 여관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하고 도착한 봉하마을은 가로등도 몇 개 없는 말 그대로 동네 사람들만 사는 그런 시골이었다. 깜깜한 마을에 유일한 불빛은 봉화산 위 정토원으로 향하는 연등이었고 달리 방법이 없는 우리는 어둠을 헤치고 산을 올랐다. 여자애 둘이 오밤중에 사찰 마당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보살님은 매우 놀랐을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주지 스님이 지내는 곳 한편에 이부자리를 마련해주셨다.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무슨 객기였는지 모르겠다. 스님은 내일은 49재날이니 사람들로 바글거릴 테니 지금 미리 절을 올리라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그의 영정사진, 새소리 곤충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 향 냄새. 뭐가 뭔지도 모르고 절을 올리고 나왔을 때 봉하마을에 오면 그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그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고 가슴은 답답했다. 그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다음 날은 손님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봉사단의 수장 우물지기 교수님을 따라 나름대로 손을 보탰다. 고등학생 여자애 둘이 기특했는지 다른 봉사단 아줌마들 몰래 특별 제작한 손수건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보살님들도 돌아가는 길에 차비라도 하라며 주머니에 용돈을 넣어주시고, 간식을 싸주시고. 봉하마을 가득히 채운 추모객들을 보며, 지금은 대통령이 된 그의 친구와 국회의원이 되어 구태 정치를 하고 있는 과거의 동지들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못다 이룬 그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더 지났다. 그를 까마득히 잊으며 지냈던 날들도, 그의 비전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살아간 날들도 있었다. 숫자를 조합해야 하는 비밀번호에 대부분 그의 서거일이 들어간다. 그렇게라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의 꿈이 다 이루어진다면, 그가 꿈꿨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그를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상이 와도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을지도.
고등학교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연설은 아이팟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트랙 중 하나다. 나는 아직도 이 연설보다 가슴 뛰는 연설을 만나지 못했다.
"조선 건국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음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하는 사람은 모든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옆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며 밥값을 하면서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새겨 담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활기 넘치던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고만두거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지금 차례에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랜만에 그의 연설을 들어본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세상을 보고 어떤 비전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의 연설이, 그의 이야기가,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