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버른앨리스 May 07. 2018

신박한 길거리 인종/성차별 대응방법 개발기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으로 볼 때

나는 호주가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던 좋은 사람, 덜 좋은 사람, 격 떨어지는 사람은 있고 또라이보존법칙에 따라 운나쁘게 인종차별주의자를 만나는 날도 있는 거지, 하는 마음이랄까. 그리고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고 믿고 그렇게 알고 잘 살고 있어. (멜버른이 호주 내 대도시 중 가장 인종이 다양하고 다문화가 잘 정착된 세련된 도시인 점과 도시일 수록 개방적이고 시골일수록 보수적인데 나는 시티 중심에 살고 있는 점이 아마 크게 작용했을 듯. 호주 전체로 보면 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종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냐? 그건 아니지. 길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던진 물풍선도 맞아보았고 한국인인데 왜 차이니즈 말 못 하냐, 너는 여기 살고 싶으니까 호주 남자 만나고 싶겠네 라는 소리를 듣고. 같은 직급으로 같은 일 하면서 호주 남자애들보다 1불을 덜 받는다는 걸 안 적도 있고 길가다가 니하오~하는 사람은 귀여운 수준, 너는 한국인치고 영어 잘한다 소리는 이제 웃으면서 '다른 괜찮은 칭찬은 없니?'하고 넘김. 



내가 지금 차별을 당하고 있는 건가?

싶은 본능적으로 쎄한 상황들 앞에서 내가 화를 내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어. 착하고 순해서 싸움을 싫어해서도 아닌 것이 나는 진짜 판벌어지면 누구보다 잘 싸우고 져본 역사가 없음. 하지만 싸우려다가도 10초 정도 이 상황에 대입해서 나를 돌아보는 역지사지의 시간을 가지면 바로 분이 풀리기 때문에 ㅋㅋㅋㅋㅋ보통은 좋게 좋게 넘어가는 편이야. 

왜냐하면 나도 초딩 때 베란다에서 물풍선을 행인에게 던져본 경험이 있고 (그렇지, 동생아?^^), 프랑스인에게 다짜고짜 '헬로~'를 했다가 '백인의 메이저 언어가 영어라고 해서 모두가 영어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같은 일을 하는 자국민의 반 밖에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을 알고 있고 떡볶이 먹는 호주 친구들에게 '너 백인치고 매운 거 잘 먹는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묻는 '그러는 너는?' 의 역지사지 10초면 보통 화가 수그러들어.  


그리고 또 하나는 매번 내가 성차별을 당하는 건지 인종차별을 당하는 건지 헷갈리는 관계로 어떤 장단으로 칼춤을 추며 성질을 부려야 할지 주춤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 예를 들면 내가 요리사로서 시급 1불을 덜 받는 게 내가 외국인 이어서일까, 아니면 남자애들보다 힘을 못쓰는 여자애라서 일까? 두 가지 대입이 가능한 경우. 그래서 보통 칼춤을 두 번 춤. 


너 이래서 그래? 아니야? 그럼 이거야? 이렇게. 





오늘 있었던 일도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내가 지금 성차별을 당한 거야, 인종차별을 당한 거야? 싶은 일이야. 

캣콜링 비슷한 걸 당하는 아시안 여자들은 대부분 이게 헷갈릴 듯. 두 가지 대입이 가능하잖아.

저 친구는 내가 여자라서 우스운 걸까, 아님 아시안이라서 우스운 걸까.


오늘의 귀갓길, 초저녁부터 거나하게 취한 호주 남자 4명과 여자 1명이 나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어. 그중 한 명이 사탕이 들어있는 봉다리를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HEY, YOU WANT A LOLLY?


여기까지는 무례한 발언도 아니고 취한 놈 상대해서 뭐하나 하고 그냥 무시하려고 하는데 다시


YOU REALLY DON T WANT MY LOLLY? IT`S HUGE~


옆에서 친구들이 깔깔 웃고 누군가는 말리는 소리가 들리는 뻔한 상황. 돌아섰지, 당연히. 

호주 9년 차의 레스토랑 운영하는 여자로서, 이런 일은 매주 겪는 일이고 놀랍지도 않아. (왜냐면 우리 집과 가게가 시티 한중심 클럽이 모여있는 큰길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주말마다 겪는다) 보통은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니? 다시 말해봐. 하고 그 친구 턱 밑까지 고개를 들이미는 게 평소 레퍼토리인데 이번에는 작전을 바꿔서 대처해보았어. 근데 그 작전이 꽤나 효과적이더라고. 공유해야겠다 싶었어.





자, 먼저 활짝 웃으면서 당당하게 다가가서 손을 먼저 내밀고 인사를 청함.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


HI, HOW ARE YOU. NICE MEETING YOU. I AM ALICE. WHAT IS YOUR NAME?


이 것이 여러모로 이 친구들의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에 이 친구들은 무조건 당황을 하게 되어있어.

첫 번째로 지나갈 줄 알았는데 다시 홱 돌아와서 눈앞에 꼿꼿이 서있어서.

두 번째로 영어가 유창해서. (언어나 문화의 장벽 때문에 그 희롱을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는 가능성 없어짐), 

세 번째로는 당연히 화내는 게 다음 그림인데 반대로 너무 친절하게 다가와서.

결정적으로 너무 빠르게 진행이 되어서 멍청한 대가리 굴릴 시간이 없기 마련이거든. 


어버버 하면서 악수를 하며 서로 통성명을 하면 주변 친구들은 그때부터 뭔가 싶고 싸움이 날까 봐 상황을 무마하려고 끼어드는게 보통이야. SORRY TO BOTHER YOU. HE IS JUST REALLY WEIRD라는 소리가 친구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 그때부터 웃으면서 가해자에게 초등학생 대하듯 에구 모자란 것, 착하지, 하고 착한 독설을 퍼부으면 끝. 

포인트는 이게 욕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이야기하는 거야. 마치 내가 받았듯이. 

이 새끼가 나한테 사탕을 주려는 거야, 아님 나를 놀리는 거야?를 헷갈리게 했듯이 고대로 돌려주면 돼.


YOU LOOK LIKE A DECENT PERSON. AND I AM SURE YOU WERE OFFERING ME A LOLLY AS A KIND GESTURE. BUT NOWADAYS, PEOPLE CALL WHAT YOU JUST DID 'BEING A RACIST OR SEXIST'. ( 이 사이에 하고 싶은 말들을 한다. 네가 단순히 백인이라서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만큼 불쌍한 게 없는 거 같아 라던지 백인이라서 더 꼬추가 크다니 너무 크리셰하다. 라던지. 등등)

I JUST WANTED YOU TO KNOW COZ IT LOOKS LIKE YOU DON T KNOW ANY OF THAT.  IT IS REALLY REALLY NOT OKAY NOW. ANYHOW, NICE TALKING TO YOU. HAVE FUN TONIGHT, GUYS!


<해석 : 너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 그리고 네가 나한테 사탕을 주려고 친절하게 권유한 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요즘 세상 사람들은 방금 네가 한 거를 인종차별, 성차별이라고 불러.....(이 사이에 하고 싶은 말들을 한다. SIMPLY 네가 백인이라서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만큼 불쌍한 게 없어, 라던지 혹은  백인이라서 더 꼬추가 크다니 너 젊은 애가 너무 크리셰하다. 등등) 나는 너한테 이런 걸 알려주고 싶었어. 왜냐면 너는 모르는 거 같아서. 요새 세상에는 정말 정말 아니란다. 아무튼 이야기 즐거웠어. 너네들 좋은 밤보내!>





이런 상황에서 다음 그림은 뻔해.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동안 가해자는 계속 딴소리할 거야. 롤리 먹을래? 난 그냥 롤리 먹으라고 한 거지~ 싫어?.. 하고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척, 멍청한 척을 하고 계속 장난을 칠거야. 동공지진은 올지언정 친구들 앞이니 굽히거나 사과하지는 않고 버틸 거임. 내가 여태껏 이런 거로 싸운 모든 호주 남자 (그리고 다른 나라 남자...)들은 그랬어.


 '장난인데~ 장난이야 ㅋㅋㅋㅋ웃기지 않아? 근데, 진짜 싫어? 안 먹을래?ㅋㅋㅋㅋㅋㅋ'


 본인들도 사실 기분은 상하거든. 가장 싫은, 여자한테 듣는 '너 잘 모르는구나?'를 당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웃겨보려고 허세 떤 건데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흐르니까 당황은 되는데 자존심에 굽힐 수는 없고 그렇다고 교양 있게 나오는 앞에서 싸울 수도 없으니 계속 '나는야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 버전으로 밀고 나갈 거야. 그럴 때 절대 절대 말려들지 말고 계속 차분히 말하면 그쪽 꼴은 점점 우스워지게 되있어.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이 몰리고 친구들의 얼굴이 굳고 몸 둘 바 몰라서 허둥지둥 사과 계속하고 친구들이 가해자한테 뭐라고 하고 나한테 대신 변명하고 진짜 분위기가 갑분싸 되기 마련. 


보통 호주애들은 그룹에 또라이가 섞여있고 싸구려라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DO THE RIGHT THING'을 해야 하고 그게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라이를 두둔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오늘 그룹의 여자애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진짜 같은 FEMALE로 저 애 친구로서 너무 미안하고 자기도 계속 말했고 그러면 안된다고 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고 진짜 창피하고 너무 역겹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나를 꼭 안고 놓지 않더라고. 다른 남자애들도 그 친구의 롤리 봉지를 뺏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으면서 THAT`S IT, BUDDY. YOU ARE GOING HOME이라고 하고 나한테 여러 번 사과하였고, 가해자도 결국에는 나한테 


쏘리, I GET WHAT U MEAN... 


이라고 웅얼웅얼 사과함. 사과라도 어른스럽게 했으면 동등하게 싸웠다는 생각을 할 텐데 웅얼웅얼 엄마한테 등짝 맞고 어쩔 수 없이 미아내...하는 애 같은 얼굴을 보니 뭐 저런 모자란 것이랑 상대를 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짠하더라. 암튼 나는 웃으면서 됐고, 일단 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물 많이 먹고 자라고 하고 모두 토닥토닥해주고 집으로 옴. 


여러 번 싸우고 여러 번 대거리하고 많은 사과를 받아보았지만 이번만큼 완벽한 승리랄까 하는 건 없었어.  똑같은 레벨로 물고 뜯고 싸우고 씩씩대면서 그래도 불리한 상황인데 안 밀렸다 하고 찝찝하게 좋아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번에 나는 전혀 불리하지 않았고 약자인 위치에서 바득바득 싸우지 않았으며 내가 원하는 바 -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낸 것 같은 기분과 내 목소리를 제대로 정확하게 낸 듯한 성취감 - 을 얻었다고 할까ㅋㅋㅋㅋ 


그래서 호주에서 꿋꿋하게 살고 있는 자매들에게 이 신종 대처 방법을 전수하려고 긴 글을 쪄보았어.....




자, 그러면 총정리.


1.  당당하고 예의 바르고 밝은 인사로 '우리도 너네랑 같은 사람이고 언어가 통하며 같은 감정을 느낀단다'를 알림. 내 이름을 말하고 네 이름을 물어보는 게 포인트. 나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길 위의 아시안 걸이 아니고. 너는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이니? 일단 교양 있는 태도로  모두에게 어필하면서 A BETTER PERSON이라는 우위를 선점할 수 있게 된다.


2. 너는 괜찮은 사람이겠지만 요새 세상에는 이런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거 같아~ (궁극의 공격 '어머, 아직도 잘 모르시는구나?')를 시전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가며 돌려 깜. 영어를 못한다고 하면 이럴 때 이런 식의 대사를 외우면 좋음 - 내가 영어를 못하는 건 내가 다른 나라말을 할 줄 알아서라는 걸 생각해본 적 있니..? 혹은 영어를 하는 게 너한테 자랑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알고는 있니? (쪽지 혹은 댓글 남겨주시면 대본 만들어드림)


3. 아무튼 이야기 즐거웠어. 어디 가서 욕먹고 다니지 말라고. 너 나름 괜찮은 애 같으니까. 그럼 좋은 밤보 내! 하고 쿨하게 돌아섬. 친구들이 미안하다고 해도 대인배 같은 면모로 괜찮다고 네 친구 조금 잘 모르는 거 같으니 잘 챙겨주렴 하고 토닥토닥하고 돌아섬.



많은 방법으로 싸워보았지만 가장 효과가 제대로 났답니다. 그래서 까먹기 전에 써놓아요.

물론 만취한 애들한테는 안 통하겠지만요. 




https://brunch.co.kr/magazine/movetoaustralia


https://brunch.co.kr/magazine/your-migrant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aliceinmelbourn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