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by 앤N

“헤어지자.”

“넌 그게 케이크랑 커피 시켜놓고 할 말이냐?

“그럼 프러포즈처럼 호텔이라도 빌려서 하리?”

“하……. 말을 말자. 알겠어.”

“쿨하네? 나 먼저 간다.”


또 한 번의 연애가 끝났다. 이젠 그러려니 한다.

지질했던 지난 경험들 덕분일까,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는 지금의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당근 케이크와 드립 커피를 혼자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찌나 다들 사이가 좋은지. 드립 커피의 개운함으로 다시 정신을 깨운다.


카페에 흘러나오는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라는 노래 가사가 유독 귀에 꽂힌다. 이 노래도 나처럼 이별했을 때 지은 걸까? 흩날리는 낙엽이 벚꽃처럼 보인다. 커플들을 보며 ‘너네도 다 헤어져!’라고 생각했다가, '아니다. 잘 맞는 커플끼리 행복하게 지내다가 결혼해서 국가 저출산에 이바지하는 게 낫지.’라는 생각으로 옮겨간다.


혼자라면 다 먹었을 조각 케이크를 반이나 남겨두고 거리로 나왔다. 재미없다. 무수한 싸움에 지쳐 혼자가 된 건 편한데, 혼자니까 재미가 없다. 길가에 있는 간판 이름 하나를 보고도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고, 서로의 얼굴만 봐도 재밌어서 깔깔 웃던 사람이 사라졌다.


지혁이와 나는 화에 대한 역치가 달랐다. 내가 볼 때 지혁이는 별거 아닌 것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지혁이는 화가 날 때 웃음으로 풀어주려는 나를 보고 더 짜증이 났겠지. 그거 빼고는 다 좋았다. 매번 다정하고 예쁜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행동으로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내 것만 사기 뭐해서 네 것도 같이 샀어.”라며 귀여운 신발을 사주기도 하고, 음식을 먹을 때 항상 내 앞접시를 채워주던 사람이었다. 연인 사이에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 중 지혁이는 제일 다정했다. 무뚝뚝한 사람이 많은 경상도에 살아서 사소한 친절이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전 연인들의 성격이 다정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고.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허한 마음으로 집에 가기도 싫고, 혼자 갈 곳도 없고, 갑자기 부를 친구도 없다. 또 인간은 혼자라는 염세주의에 빠진다. 당분간 가족이 ‘결혼은 언제 하냐’고 잔소리를 하면 ‘비혼주의예요.’라고 얘기해야겠지.


우리 둘의 추억이 가득한 거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구름이 어찌나 예쁜지. 꼭 지혁이네 강아지 몽몽이를 닮았다. 아휴, 헤어지면 전 연인이 아니라 강아지가 보고 싶다더니 진짜네.


정처 없이 걷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조용한 카페가 보였다. 손님이 없는 가게는 잘 들어가지 않는데, 책이 쌓여있는 모습이 궁금해서 카페 문을 열었다.


띠링-


“어서 오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카페 이름은 안 보고 들어왔는데 길모퉁이에 있어서 길모퉁이 북카페인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음료는 맛있을까? 찰나의 생각을 뒤로하고 오늘의 이별을 자축하기 위해(위로라고 하긴 싫고) 시그니처 메뉴를 시켰다.


“책은 그냥 읽어도 되나요?”

“네. 비치된 책은 모두 읽으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아끼는 아이들이라 소중히 다뤄주세요.”


뭔가 모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장님 때문에 구비된 책도 궁금했다.





‘기적’


그래. 우리의 만남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드넓은 지구에서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대단한 인연이라고.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연인이라는 관계로 만난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가.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연습장처럼 빈 종이만 있는 게 아닌가.


“사장님, 혹시 이 책…….”

“아, ‘기적’이요? 이건 손님들이 채워주시는 책인데, 어제 꽉 차서 새것으로 교체했어요. 손님이 이 기적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시겠네요.”

“네? 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바로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왠지 뭔가 써야 할 것 같았다.


- 또 다른 기적을 기다립니다.


신기하다. 속이 편안하다. 만성 위염이 있어서 커피를 많이 마시면 속이 쓰린데 왜 두 잔이나 마셨는데 괜찮은 거지? 이것도 기적인가 생각하다 혼자 웃음이 픽 나왔다.


“혹시 이 책은 어떠세요?”

“기억…….이네요?”

“여기엔 손님들이 행복한 기억을 그림으로 남겨주셨어요.”

“아……. 제가 똥손이라 나중에 올게요.”


굳이 똥손이란 말을 왜 했을까. 부끄러워 상기된 얼굴로 카페를 나왔다. “손님!” 하고 부르는 말을 듣지 못한 채.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사에 출근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도 마음을 꾹 누르며 출근하는 모든 이들을 존경하며. ‘누군가도 나처럼 이별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라는 생각과 함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글 씨, 주말 잘 보냈어요?”

“네. 과장님도 잘 보내셨죠?”


형식적이지만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오늘의 업무를 살펴보았다. 아, 내 이름은 한글이다. 성이 한, 이름이 글. 그래서 다른 분들이 ‘글씨’라고 부를 때 너무 부끄럽다. 한글학자인 아버지께서 당신 이름을 바꾸시려다 마침 내가 태어나서 이름을 한글로 지었다나 뭐라나. 아버지께선 당신이 ‘한’ 씨인 걸 엄청 기뻐하신다. 내가 이 씨였다면 이글이었을 테니.


- 빠빠 빠빠빠 빠빠 굿모닝~


“엥 알람이 왜 지금 울려요? 하하.”

아이고, 죄송해요. 제 벨 소리예요.”

알람 소리를 벨 소리로 잘못 설정해 두고 귀찮아서 안 바꿨더니 낮이고 밤이고 굿모닝이란다. 사실 Good이란 말이 듣기 좋아서 계속 쓰는 중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한글 씨 맞으신가요?”

“어? 네네. 맞아요. 제 번호는 어떻게…….”

“어제 저희 매장에 지갑을 두고 가셨어요. 나가실 때 ‘손님!’하고 불렀는데 안 보일 만큼 빨리 가신 것 같더라고요. 실례지만 찾아드리고 싶어서 지갑 안에 있는 명함을 봤어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 북카페 몇 시까지 열려있나요?”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열려있어요.”

“네?”

“이따 뵐게요. 글 씨.”


뭐지……? 어젠 그저 신비로운 분위기의 사장님이라고 생각했는데, 특이하신 분이네.


“글 씨. 뭐 잃어버렸어?”

“아……. 제가 어제 카페에 지갑을 두고 왔네요.”

“어쩌다 그랬어~ 젊은 사람이. 마치고 얼른 찾으러 가 봐.”

“근데 과장님. 가로등이 몇 시까지 켜져 있죠?”

“가로등? 우리 동네 밤새도록 켜져 있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