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by 앤N

띠링 -


“어서 오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허……. 헉……. 사장님…….”

“아! 지갑 찾으러 오셨군요. 잠깐 앉아계시겠어요?”


나 왜 뛰어왔지? 얼떨결에 앉아버렸네. 뭐 어때.


“글 씨,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게 뭐죠?”

“지금 창밖을 보시겠어요?”


사장님 말씀에 홀린 듯 창밖을 바라보니 로맨스 소설 한 편을 뚝딱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노을이 아련하게 지고 있었다.


“그거예요.”

“네?”


신비로움을 넘어 특이해 보였던 사장님의 미소가 수상해 보였다. 대체 창밖이 뭐란 말인가. 혹여나 음료수에 독을 탄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찰나, 내 눈빛이 읽혔나 보다.


“독 든 거 아니니까 편하게 드세요. 지갑은 카운터 안쪽에 잘 보관해 뒀어요. 얼른 가지고 올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커피 받침에서 잔을 들어 올렸다. 찻물 색깔이 붉은 노을빛을 꼭 닮아 있었다. 그제야 메뉴판에 적힌 '노을차'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모금 조심스레 마시자, 이별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왔던 긴장이 탁 풀려 온몸으로 온기가 퍼지는 기분이다. 나른하다.





“글씨, 여기 지갑이요.”

“감사합니다. 차도 잘 마셨어요.”

“음료는 2만 원이에요.”

“네?”


이래서 공짜로 주는 건 마시면 안 되는데, 웬 날벼락인가.


“농담입니다. 또 들러주신 서비스예요.”

“네…. 근데 음료가 진짜 2만 원…….”

“서비스예요.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기적이잖아요. 다음에 또 오실 거죠?”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사장님의 대화 흐름을 도통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네. 또 놀러 올게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심히 가세요. 더 쉬다 가셔도 되고요.”


그렇게 나가려던 찰나 기적 책이 보였다. 내가 썼던 글이 잘 있나 살펴보니 글씨가 분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 검은색으로 글을 썼는데 말이다. 그냥 나가려다 홀린 듯 또 기적책에 글을 쓰고 나왔다.


- 내 인연이 있긴 할까?


이별에 괜찮은 척했지만 헤어짐엔 도통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산책로에 흩어져있는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낙엽에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하늘 까맣다. 타들어 가는 내 마음 같네.”


누가 봐도 실연당한 여자처럼 보일까 봐 얼른 집으로 향했다. 걷다 보니 지갑을 찾아준 사장님께 사례는커녕, 음료만 얻어먹고 온 스스로가 황당해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상은 반복됐고, 평소와 같은 척 열심히 출근했다. 회사에서 사생활을 배려해주지 않지만, 배려해 준다고 해도 이런 일은 들키기 싫다.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에 서자 '세부 파견 공고'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확 저기로 도망이나 가버릴까? 에이, 내가 무슨.


“퇴근합시다. 아참, 글 씨! 지갑 찾았어?”

“네, 과장님. 어제 갔던 카페에 두고 왔더라고요.”

“다행이네. 오늘도 고생했어요.”


가을이 깊어지며 하늘은 어느새 각기 다른 붉은빛 줄무늬로 채워졌다. 혼자 걷는 내가 외로울까 봐 벚나무였던 것 같은 나무들이 양옆을 지켜줬다.


“어?”

가을인데 벚꽃이 남아있는 것 같이 보였다.


“너 안 외로워? 네가 기적이다.”

파마를 하고 싶으면 온 동네에 파마한 사람만 보이는 것처럼, 기적 책을 본 후론 모든 일이 기적같이 느껴진다.





띠링 -


"어서 오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어? 글 씨, 또 오셨네요!"

“크흠. 온종일 일하는데 낮잠이 너무 와서… 어제 먹은 티가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쓸데없는 TMI를 얘기하고 있는 내 입은 도통 멈출 줄을 모른다.


“노을차도 좋지만 오늘은 달빛차 어떠세요? 스트레스를 완화해 줘서 자기 전에 진정 차로 권해드려요. 거기다 저의 특별 재료를 조금 더 넣었죠. 푹 주무시면 내일 낮잠이 안 올 거예요.”

“네. 그걸로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 나 그대의 눈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게 꿈인 것 같아요~ 이 세상 많은 사람 중에 어쩌면 우리 둘이었는지 기적이었는지도 몰라요 ♬


마침 카페에 김동률과 이소은의 ‘기적’ 노래가 흘러나왔다. 일부러 트신 건가 의심스러웠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사장님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음료를 가져다주시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카페에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요.”

안 물어봤는데 사장님이 혼잣말을 시작하셨다.


“책은 늙지 않잖아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대로 제 곁에 있어 주죠. 버리지 않는다면 죽지도 않고요. 그래서 책을 읽으면 제가 처음 그 책을 만났을 때로 돌아가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더라고요.”


말씀을 듣고 나니 북카페에 있는 책을 왜 아끼는 아이들이라 하셨는지 이해가 됐다.


“멋지네요.”

속삭이듯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왔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 달빛차를 마시는데, 창밖에 파란 나비가 보였다. 아니, 파란색 나비가 세상에 있었나? 헛걸 봤나? 이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띠링 -


“어서 오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안녕하세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짙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인사말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와... 덩치 좋다...’ 곰 같은 체격에 그렇지 못한 순한 눈매. 그러고 보니 북카페에서 다른 손님을 본 건 처음이다.


“시그니처 메뉴 하나 주세요. 음, 여기 책은 그냥 읽어도 되나요?”

“네. 비치된 책은 모두 읽으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아끼는 아이들이라 소중히 다뤄주세요.”


이틀 전 내가 했던 대화와 똑같은 말이 오고 갔다. 저 사람도 실연당했나? 어우 한글. 다 너 같은 줄 아니. 반성 좀 해라….


“이 책은…….”

남자 손님의 말에 사장님께서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기적 책은 손님들이 채워주시는 책이에요. 편히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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