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by 앤N


"글씨가 다 분홍색이네요?"


남자의 말에 벌떡 일어나서 기적 책을 확인해 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모든 글씨가 깔끔하게 바뀐 거지? 펜을 살펴봤는데 보통의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남자는 시그니처 메뉴를 마시며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덩치는 산만해서 꼭 스릴러, 범죄물을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였다. 또 한 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나, 왜 그랬을까. 갑자기 부끄러워져 도망치듯 북카페를 나왔다.





다음 날, 그 남자가 또 올까 싶어 길모퉁이 북카페로 향했다.

‘나 왜 이러냐.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아냐. 궁금할 수도 있지. 아, 아! 몰라 몰라 몰라아악!’


속마음이 시끄러워 고개를 마구 저으며 카페를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다.


“으악!”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아아… 아니에요. 제가 앞을 똑바로 못 봤네요.”

“예. 죄송합니다. 근데 여기 자주 오시네요?”

“하하… 여기 달빛차 맛있어요. 드셔보셨어요?”

문 앞에서 부딪칠 뻔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카운터 뒤에 계셨던 사장님께서 나오셨다.


“어서 오세요~ 어?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셨네요?”

“사장님! 달빛차 한 잔 부탁드려요!”

“손님, 목이 많이 마르셨나 보네요. 얼른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급하게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근데 저 남자, MBTI가 E인가? 붙임성 좋네. 단풍에 물든 풍경이 아닌 남자를 향하던 시선 탓인지 오늘도 눈이 마주쳤다.


“괜찮으시면 같이 먹을까요?”

무슨 용기인지 입 밖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남자는 음료를 마시고 있었지만 내 테이블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슨 소리를 했나 싶다. 내가 남자 걸 먹겠다는 거 같잖아.


“네. 그러시죠. 제가 옮길게요.”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근데 뭐 어때. 좋다고 하셨는 걸. 게다가 나는 빛이 나는 솔로인걸. ‘솔로솔로~ 솔로솔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윤동화입니다. 별명은 운동화고요.”

영화에 나올 법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귀여운 별명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그래서 계속 동화를 읽고 계세요?”

네? 아, 이거… 보셨군요. 사실 제가 연극배우를 하고 있는데 작품을 쉬고 있어요. 오디션이 어렵네요. 요즘 따뜻한 동화 같은 연극이 성적이 좋아서 극작가에 도전하려고 읽고 있었어요. 저랑 좀 안 어울리죠?”

“아녜요. 동화 씨가 만드는 동화 같은 연극! 엄청 기대되는데요? 오디션도 금방 붙으실 거고요.”


“주문하신 달빛차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 친해지셨네요.”

“하하… 그러게요. 이야기가 재밌네요.”

“멋지네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사장님과 나만 이야기를 나누어서 사장님이 자리를 떠나시자 뻘쭘해졌다.


“그런데 성함이……?”

“어맛, 제 이름을 말씀 안 드렸네요. 제 이름은 한글이에요. 성이 ‘한’, 이름이 ‘글’이요. 사람들이 ‘글 씨~’라고 부르면 글자 같기도 하고 전라도 사투리 같기도 하죠.”

“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엄청 예쁜 이름이네요.”


무수히 들은 칭찬이었지만 다정한 말투에 심장이 찌릿했다. 이리 빨리 설렘이 생기다니. 잠시만, 저 오해하지 마세요. 저 금사빠 아니에요. 금세 사랑에 빠질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빠지긴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디 쉽나요?


“감사합니다. 친구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글 씨~ 글 씨~라고 놀릴 땐 싫었는데, 지금은 특이해서 좋아요. 사전에도 있는 이름이고요.”

“저도 사전에 이름 있어요!”

“그러네요?”

“그래서 편했나? 저 모르는 사람이랑 이렇게 말해보는 거 처음이에요.”


겉으로 보기엔 자연스러운 대화였지만, 온몸이 간질간질했다. 동화 씨에 관한 생각이 세포 곳곳에 알알이 박히는 것처럼.


“연극은 어떤 것 하셨어요? 저 연극 자주 보러 가거든요!”

“<바닷가 고양이>, <어서 오세요, 대구 북카페입니다>, <코인 세탁소>… 뭐 이런 거 했어요.”

“정말요? 저 그거 다 봤어요! 동화 씨 연기 봤을 수도 있겠는데요?”

“괜히 부끄럽네요. 무대에 못 선 지 6개월이 넘어서 감도 다 잃었어요. 그래서 극작가에 도전 중이고요.”

“뭘 하든 잘 될 거예요. 혹시 저기 있는 기적 책 보셨어요? 바라는 기적이 있다면 써 보세요. 저도 이루어진 거 같아서요.”

“음…….”





- 매회 매진시키는 극작가 되기


동화의 검은 글씨가 기적 책 한 페이지에 채워졌다.


“밖에 달이 엄청 똥그랗네요.”

“오늘 보름달이에요! 소원 비세요!”

“네?”


“아까 글 씨가 기적 책에 적은 내용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하셨죠? 제겐 보름달이 북카페의 기적 책 같은 존재예요. 달님이 가끔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더라고요.”

“동화 같은 이야기네요.”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동화 씨가 마냥 순수한 어린아이 같아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내일은 뭐 하세요?”

“내일은 도서관에 단어 수집하러 가요. 연극 대사에 예쁜 말들을 쓰고 싶어서요.”

“엄청 근사한데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글 씨는 출근하시지 않아요?”

“아, 맞다. 그렇게 제 출근을 상기시켜주시지 마시라고요~ 퇴근하고 스트레스 쫙 풀려서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죄송해요. 그럼 주말에 어때요?”

“좋아요! 도서관 길 건너에 있는 곳 가시는 거죠? 토요일 오전 11시! 어때요?”

“네, 그래요.”


그 뒤로 한참을 이야기하다 졸음이 밀려와 토요일을 기약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일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한 대리. 뭐 좋은 일 있어? 일하는데 헤벌쭉하네?”

“나쁠 게 뭐 있나요~ 기분 좋게 일하려고요!”

“이야. 글씨 대리 되더니 마음가짐도 승진했네?”

"뭘요."


드디어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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