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by 앤N


정장만 고수하며 출근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샤랄라한 치마를 입으니 바람 따라 내 마음도 춤을 추는 것 같다. 민낯으로 다니던 얼굴에 촉촉한 파운데이션을 톡톡 두드려주니, 거울 속 내가 낯설면서도 반갑다.


'오늘 나, 누가 봐도 데이트하는 사람 같은데?’

혼자 상상하다 얼굴이 붉어져 볼터치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전 11시, 경문 도서관 앞.


일부러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는데 동화 씨가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하려다 멈칫했다. 참, 우리 서로 연락처도 모르지. 바람맞은 건지 불안한 생각이 스칠 때쯤, 멀리서 덩치 큰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헉……. 헉……. 글 씨! 허……. 헉……. 죄……. 송해요.”

“동화 씨! 왜 그렇게 뛰어오셨어요?”

“변명 같겠지만… 너무 일찍 나와서 산책을 좀 했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막 적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네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음, 1분이 억겁의 시간 같았달까요?”


장난스러운 내 대답에 동화 씨가 안절부절못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그리고 이거요….”

동화 씨가 내민 쇼핑백에는 온통 노란색뿐이었다. 레몬 사탕, 레몬주스, 레몬 마들렌, 레몬 타르트, 레몬 파운드케이크….


“저는 레몬을 먹으면 집중이 잘 되거든요. 대학 입시 때도 레몬주스 마시고 면접 잘 봤어요. 그 뒤로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레몬을 챙겨요.”


나를 위해 챙겨 온 간식, 그리고 ‘중요한 일’이라는 말. 그 속에 담긴 의미에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향이 참 좋네요. 맛있을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럼 이제 도서관에 들어가 볼까요?”

아무렇지 않은 척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동화 씨는 주로 어떤 책 보세요?”

“요즘은 동화를 많이 보긴 하는데 골고루 읽어요. 혹시 배정화 작가님 아세요? 그분께서 글 쓸 때 유의어를 많이 찾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배정화 작가님! 이번에 김진수 감독님이랑 만든 연극, 미국 진출하지 않았어요?”

“역시 글 씨, 연극 많이 보신다더니 잘 아시네요. 저도 그 말씀 듣고 유의어 공책을 만들어서 끄적이고 있어요. 아이디어 공책도 따로 있고요.”


“와. 매일 그렇게 노력하면 ‘레몬 동화’가 레몬 사탕이든 레몬 케이크든 뭐든 되겠는데요?”

“네? 하하! 글 씨는 정말 밝은 것 같아요. 꼭 레몬 같아요.”


유죄 인간이다.


내 인생에서 지혁이 같이 다정한 사람은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한 사람이 나타났다. 경상도 남자가 무뚝뚝할 거라는 내 편견은 유리 조각처럼 쟁그랑 깨져 사라졌다.


1시간 정도 각자 책을 읽고 점심을 먹으러 ‘사과 거리’로 나왔다. 매일 걷는 거리에 있는 사과나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특별해 보일까. 건너편 벚나무를 보고 놀랐던 때처럼, 손끝에 맴도는 레몬향 때문인지 흔한 사과나무마저 다르게 보였다.





“글 씨, 제가 예약해 둔 곳이 있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뭐든 맛있게 먹겠습니다!”

식당에 들어서자 정갈하게 세팅된 포크와 나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서버분이 의자까지 빼주셨다.


뭐야, 뭐야…. 첫 식사에 코스 요리 예약하는 남자라니. 나만 설레발치는 게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메뉴판을 슬쩍 보니 가격이 뜨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커피는 무조건 내가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음식은 옥수수 크림수프입니다. 수프를 드시고 웰컴 티를 드시면 다음 음식을 더 풍미 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인사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글 씨, 우리 방금 거의 쌍둥이처럼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게요. 이럴 때 여자들끼리는 뭐라고 외치는데, 동화 씨랑은 못하겠네요.”

“네? 아, 남자들도 그 말하는 애들 있어요.”

“진짜요? 저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남중, 남고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 좀 깨네요.”

“오? 저는 남중 남고 나왔어요. 아쉽지만 로망과 현실은 너무 다를걸요? 오!”


동화 씨는 갑자기 노트를 꺼내더니 무언가 적었다.


- 찌찌뽕


“푸하.”

그 글씨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다행히 동화 씨는 오해 없이 내 웃음을 받아주는 눈치다.


“찌찌뽕에 대한 유의어를 써 보려고요.”

그때 직원이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두 번째 메뉴는 버터 소스를 곁들인 농어구이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크하하하. 음식 설명하시는데 웃음 참느라 혼났잖아요. 수프 먹다가 뱉을 뻔했어요.”

“음, ‘찌찌뽕’ 유의어라…. ‘이심전심’, ‘단짝’, ‘소울메이트’, ‘운명’ 이런 단어가 맞겠죠?”


웃다가 진지해지는 동화 씨의 알 수 없는 매력에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운명’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운명, 운명, 운명….





“글 씨?”

“아, 네! 운명! 우리 운명이네요!”

“네?”

“그… 아까 ‘감사합니다’ 동시에 말한 그거요! 운명!”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쳐버려서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 그거요! 하긴 ‘찌찌뽕’은 좀 민망하니까 앞으로 또 통하면 ‘운명’이라고 말할까요?”

“네, 좋아요. 하하….”


도통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벌써 러브레터라도 받은 기분이다. 동화 씨는 오늘 도서관에서 어떤 단어들을 수집했을까. 나는 오늘 ‘운명’이라는 단어만 가득 수집한 것 같다.


“근데 이 웰컴 티, 레몬티 아니에요?”

“그렇죠? 저도 마시면서 레몬티라서 신기했어요. 오늘 식당 예약 정말 잘했나 봐요.”

“저도 오늘 원 없이 레몬 먹겠어요.”


“혹시 질리시면….”

“아니요~ 다음에 또 레몬 메뉴로 주세요. 저 계속 집중하게요. 근데 이 레몬티, 그 북카페에도 있을까요?”

“길모퉁이 북카페요?”

“네. 전에 잠이 안 와서 사장님이 주신 차를 마셔봤는데 정말 오랜만에 푹~ 잤어요. 지각할 뻔했지만, 몸도 마음도 이완되는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사장님, 좀 특이하신 것 같아요.”

동화 씨 말에 사장님과 카페를 생각하다 카페에 가고 싶어졌다. 다시 동화 씨를 쳐다보고 말하려는데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


“이따 길모퉁이….”

“이따 길모퉁이….”


어랏?


“운명!”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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