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오랜만이네.”
“그러게…. 나와줘서 고마워.”
동화 씨와의 약속을 미루고 지혁이를 만나러 왔다.
“취직 축하해.”
“고마워.”
연인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 외의 만물이 흐리게 처리된 세상에 살다가 한순간에 우리만 흐리게 돼버릴 수 있는 관계.
“오늘 쌀쌀하길래 미리 레몬티 시켜놨어. 괜찮아?”
레몬이라는 단어에 동화 씨가 생각났다.
“어, 응…. 잘 마실게.”
영화 시작 전 암전이 된 듯 우리 사이엔 어둠만 맴돌았다.
“…보고 싶었어. 글아.”
“……”
“사실 나 엄마 돌아가셨어.”
“뭐? 야! 미쳤어? 우리가 그것도 안 되는 사이였어?”
카페를 울리는 내 목소리에 손님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다.
“아냐. 미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나 혼자 절차 알아보고 장례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어. 너도 집안일 때문에 힘들었는데 걱정시키기도 싫었고. 이번 주는 서류나 이것저것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쉽지 않네….”
“……”
“그리고 좀 아쉽더라. 취직한 거 보고 가셨으면 좋았는데… 다 치르고 나니까 합격 연락 오더라.”
“그랬구나. 고생했어. 엄청 기뻐하실 거야.”
“그렇겠지…? 그땐 미안했어.”
“뭐가?”
“한 달 동안 안 본 거. 엄마 병원비 버느라 바빴던 것도 있는데 네가 먼저 취직하니까 널 볼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더라. 너는 빛나는데 나 혼자 밤인 거 같았어.”
“무슨 소리야. 네가 진짜 밤이라고 해도 빛은 낮보다 밤에 더 잘 보이는 거 몰라? 나는 너랑 있을 때 제일 빛났어. 너만 몰랐지.”
“그렇더라. 그걸 몰라서 그렇게 화내고 너를 혼자 보내 버렸나 봐. 지금은…, 늦었지?”
“…응, 그런 거 같아. 깨진 유리를 말끔하게 되돌려도 고쳤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으니까. 깨졌던 유리를 만질 자신은 없어…. 우리 둘 다 겁쟁이네.”
“풉, 맞아. 너 귀신의 집도 무서워서 한 번도 가 본 적 없잖아.”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옛날 생각나서. 별거 안 해도 너랑 이야기하던 순간순간들이 참 좋았는데, 그걸 놓쳤네.”
“나도 즐거웠어. 그리고 3년 동안 잘해줘서 고마웠어.”
“나랑 연애할 때 행복했던 적 있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네가 행복 그 자체였는데. 네 덕에 취준생 시절 잘 이겨내고 이렇게 떳떳한 사회인이 됐잖아.”
“다행이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어서 연락했어. 그리고 나도 고마웠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파도가 태풍을 만난 듯 심장이 일렁이고 있었다.
“글이 너 먼저 가. 나는 좀 더 있다가 갈게.”
“그래…. 잘 지내.”
2주 전 물회를 먹은 식당에서도, 오늘 레몬티를 먹은 카페에서도, 나는 혼자 나왔다. 3년의 세월이 산산이 조각난 기분이었던 식당에서와 달리, 오늘은 새벽 어스름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집을 찾은 느낌이다.
“동화 씨…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어요?”
“글 씨! 당연하죠! 저 소원 숲에서 산책 중인데 어디 계세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글 씨~ 여기요~” “뭐 하고 있었어요?”
“야외 단어 수집이랄까요? 주말까지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으면 답답하더라고요.”
“오~ 많이 적었어요? 봐도 돼요?” “으아. 안 돼요!”
소원=글
숲=글
산책=글
언뜻 보인 메모장에 '글'이란 글자가 보였다.
내 이름인가? 내 이름은 왜 사전에 있는 단어라서 이렇게 확신을 받지 못하는 걸까.
“으아아아. 여기 말고, 이 페이지 보여드릴게요!”
시간 = 순간 = 선물 = 설렘 = 사랑
“우와… 동화 씨만의 유의어인가 봐요.”
“꼭 사전적으로 비슷한 말이 아니라 대사 쓸 때 바꿔 쓸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들도 적고 있어요. 연극 대사가 너무 정제되면 재미없으니까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싶더라고요.”
“이야~ 동화 씨 조만간 일낼 거예요! 배정화 작가님 이후 최초의 미국 진출 작가가 될 거 같은데요?”
“글 씨 설레발 덕에 진짜 그렇게 될 거 같네요. 고마워요. 김진수 감독님께 제 대본이 읽히는 날도 오겠죠? 음… 아직 시간 얼마 안 됐는데 우리 ‘길모퉁이 북카페’ 갈래요? 보여 드릴 것도 있고요.”
“뭔데요? 어…?”
갑자기 내 손에 올려진 레몬 사탕을 보고 눈물이 날 뻔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레몬을 먹는다던 동화 씨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보여줄 게 레몬은 아니죠?”
눈물을 참으려 농담을 건넸다.
“약속… 미뤘는데 이해해 주시고 고마워요.”
“뭘요. 기다리는 순간도 행복했어요. 글 씨가 올 걸 믿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