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길모퉁이 북카페’입니다. 오~ 두 분!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잘 지내셨죠?”
반가운 마음에 하이톤의 목소리가 나왔다.
“네, 당연하죠! 책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언제 봐도 사장님의 책 사랑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글 씨, 뭐 드실래요?”
“어? 메뉴 추가되었네요? 블랙 티, 블루 티, 핑크 티…?”
“저는 시그니처 메뉴만 하고 싶은데,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더라고요.”
“에구… 사장님, 저희가 자주 올게요!”
“말씀만으로 감사드려요.”
어딜 가나 경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동화 씨는 뭐 드실 거예요?”
“글 씨는요?”
“저는 핑크 티요.”
“저도요!”
나를 따라 주문하는 듯한 동화 씨 메뉴 선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두 분 참 잘 맞는 거 같아요. 자리에 편하게 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말씀 신나게 나누고 계세요.”
“신나게요? 하하. 네~ 사장님은 핑크 티 신나게 만들어주세요!”
사장님의 너스레에 부끄러워 오버스럽게 말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글 씨. 이 북카페 비밀 말이에요.”
“혹시 기적 책?”
“어? 어떻게 알았어요?”
“글씨 색깔이 바뀌어 있길래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어요. 왜 그런지는 아직 못 찾았어요. 색깔이 바뀐 걸 보니까 카페가 살짝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화 씨랑 같이 온 거예요”
기적 책에 글씨가 바뀌는 걸 남이 알면 안 될 것처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 글 씨, 감정을 세포 하나하나로 세세하게 느끼는 편이군요!”
“와…. 작가님 표현력은 역시 다르네요. 저는 제가 그냥 겁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특별해 보여요.”
“겁이 많은 것도 좋죠. 위험한 일에 쉽게 관여하지 않으니 안전하게 살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안전도 살펴볼 여유가 생기잖아요.”
“동화 씨! 진짜 감동이에요.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어요!”
“기적 책에서?”
“네? 왜 그래요~ 저 지금 오싹한 데요?”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가?
“하하. 죄송해요. 갑자기 얼마 전에 봤던 공포 연극이 생각나서요. 제가 기적 책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저번에 썼던 글씨 색이 바뀐 걸 봤어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하는 동화 씨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카페 펜이 색깔이 바뀌는 펜인가 싶어서 제 펜으로 새로운 걸 써뒀는데 또 분홍색이 된 거 있죠?”
상기된 얼굴로 동화 씨가 말하는 순간 사장님께서 다가오셨다.
“주문하신 핑크 티 두 잔 나왔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동시에 감사 인사를 했다. 그냥 사장님께 물어봐도 될 텐데 조용히 이야기하는 걸 보면 동화 씨도 ‘감정을 세세하게 느끼는 사람’인가 보다. 이 와중에도 온갖 생각을 하며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은은했던 내 마음이 영롱해진 것 같다.
“제 생각엔 바라는 기적이 이루어지려고 하면 색깔이 바뀌는 거 같아요.”
어릴 때 아빠 몰래 동생과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의 동화 씨는 그때의 나 같았다. 동화 씨 말이 맞다면, 내 인연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일 텐데…
“우리 새로운 글을 써두고 다음에 같이 와서 확인해 볼까요?”
동화 씨가 내 인연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좋아요! 저랑 꼭 같이 와요! 글 씨는 겁이 많으니까.”
“아까는 감정이 어떻고 저떻고 해주더니! 이제 놀리는 거예요? 약속합시다!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 도장 꾹! 도장 찍어요, 어서! 에구, 내가 뭐 하는 거람. 동화 씨랑 있으면 제가 초등학생이 되는 것 같아요.”
- 처음이 끝이 되길.
동화 씨가 새로 쓴 문장을 본 순간, 카페에 있는 온기가 오롯이 나에게 흡수된 것 같았다.
나 혼자 그 문장에 의미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의 관계가 오래되길 바랐다. 동화 씨를 만나는 순간에는 일상을 잊게 되었다. 평일엔 다시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만.
“안녕하십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어, 글 씨! 일찍 왔네? 잠깐 나 좀 볼까?”
또 출근이다. 그런데 과장님 호출이라니? 좋아하고 존경하는 과장님이라도 출근하자마자 불려 나가다니… 대체 이런 불편하고 긴장되는 감정은 몇 년 차에 좋아지는 걸까. 아빠는 어떻게 정년까지 같은 일을 하신 거지? 주머니에 있는 레몬 사탕을 만지작거리고서야 ‘나는 감정을 세세하게 느끼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글 씨! 축하해!”
“네?”
“글 씨, 한 달 전에 세부 지사 파견 근무 신청했잖아.”
헉! 잊고 있었다.
“아… 그거 이미 발표 난 거 아니었나요?”
“1년 파견 근무는 경력자들이 채워졌는데, 2개월 단기 근무로 뽑혔던데? 신청할 때 세부 요강 제대로 안 읽었어?”
세상에… 어렴풋이 지혁이와 싸우고 신청서를 급하게 써서 제출했던 기억이 났다.
‘꼭 가야 하는 거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1년 파견 근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은 경험이지 뭐. 2개월이면 방학이라 생각해도 되고.’
세부 지사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사 인력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급하게 토요일 출국을 준비하게 되었다.
“여보세요.”
“동화 씨, 미안해요. 이번 주 약속… 또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아…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저, 외국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