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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즈 Aug 08. 2017

미움받을 용기(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고찰

미움받을 용기


지금의 한국사회는 과거와 달리 수직관계로 인한 이점보다는 스트레스와 병폐가 더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의 많은 부분은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아마 성적 욕망과 결부 지어 해석하려는 프로이트보다는 아들러의 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미덕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과거 사회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인간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착한사람 컴플랙스라든지 모두에게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보다는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왜? 모두에게 잘하려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풀어주고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들러 심리학은 어느 한부분에서 갸우뚱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것처럼 공동체 감각에 대한 논리는 앞서 제시한 통찰들에 비해 약한 설득력을 보인다.

특히 타자에게 공헌할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는 대목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적어도 독자 중에는 개인적인 성취(아주 작은단위, 예를 들어서 집에서지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혼자 블랙핑크의 춤을 모두 따라 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던지, 아무도 봐주지 않을 이런 글을 꾸준히 쓴다던지 등의 성취)로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덕후들은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한 무한한 탐구과정 속에서 삶의 즐거움이나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분명 아들러 심리학은 요즘 사회의 분위기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임에는 분명하지만 프로이트와 같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심리학적 의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을 맹신할만한 어떤 것으로 보기에는 어찌보면 당연한 상식(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우리 즉 너와 나에서 시작된다)들을 어설프게 버무려놓은 비빔밥같다. 비빔밥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굳이 전주에 찾아가서 정식 전주 비빔밥을 먹지 않아도 집에서 명절에 남은 나물들을 대충 넣고 계란후라이에 슥슥 비벼 먹어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 맛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과정은 그냥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 다시말해서 사회적 발견들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듯한 심리학.

 물론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전제만큼은 아주 강렬한 통찰이다. 철학이나 심리학, 인문학들이 그동안 꿰뚫어 보려고 하였던 부분을 근본적으로 잘 지적했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늘 고매한 목표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과 실제로 모든 학문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된다는 것은 어쩌면 기득권이나 보수집단에서 볼 때 건방진 소리겠지만 꽤나 직설적이고 근본적인 통찰이다. 그렇지만 그로 인한 문제의 해결방안을 단순히 공동체 감각으로 환원하여 찾는 것은 분명 모순적이다. 아니 모순보다는 이해가 안된다고나 해야할까.

 솔직히 말해 이 책을 3번쯤 읽었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막연한 불안감(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쓸데없는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감정)이 쉽게 이책이 아닌 다른 책으로 손이 넘어가지 못하게 잡고 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이만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제는 손을 놓고 어깨에 힘풀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는 기분. 아마 다음번에 읽는다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책에 얽메이는 것에 대해 "긍정적 포기"를 하기로 하였다.

누군가에게 추천하고싶은 책은 아니다. 솔직히 나의 필요에 의해서 읽기 시작한 책일뿐 그저 오 이런것도? 이런 느낌이지 완벽하게 공감하고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약간의 위로와 나의 현실 불만에 대해 따끔한 충고의 소리가 필요할때, 용기를 얻어야겠다 싶을때 도전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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