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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 Oct 01. 2018

공감? 될 만한 인간관계 이야기

어려운 인간관계에서 살아남아 상처받지 않는 것이  인생의 작은 목표랍니다

얼마 전 읽은 책이 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제목이 너무 맘에 들어서 주저 없이 책을 골라 e-BOOK에 담았다.


책은 물 흐르듯이 술술 읽혔는데, 아마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어. 나도 이런 일 겪었는데 또는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 있어. 이런 생각이 수시로 스쳐갔다.


공감되는 글을 읽고 몇 달이 지났다. 전에 있던 직장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사고(?)가 터졌기에 인간관계나 심리에 대한 책도 많이 보았는데, 직장을 옮기고는 직장 내에서 그런 일은 아직까지는 없다. 다행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직장에서 그런 일이 없다면 또 어디서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을까. 바로 친구 관계나 또는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


가까운 관계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의 무거움 또는 무서움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많아졌다. 직장이야 사실 친구관계가 아닌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어떤 말이 화를 나게 할 수는 있어도 크게 상처받는 일은 적은 것 같다. 물론 상사가 인격모독적 발언을 한다면 좀 다르겠지만. 직장생활도 몇 년 하다 보니, 친구를 사귈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너무 시니컬한 걸까 하고 항상 생각하긴 한다.) 물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고 먼저 사회생활을 한 언니들이나 친구들로부터 많이 들어서 조심할 부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겪어봐야 확신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일상에서 만나는 '좀 힘든' 사람들을 유형화해 보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유형별로 하나씩 글을 쓸 예정이다.


1. 유형 1: 필터가 없는 유형


머릿속에서만 생각하여야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함께 대화를 하다가 보면 깜짝 놀라게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황당하면서도 뭐지? 하는 생각에 대처를 바로 못할 때가 있다.


필터가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왜 그런 걸까’ 생각해본 적이 너무나 많다. 너무 신기해서.

결론은 정답은 없지만. 일단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타인의 관점이나 기준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하는 말 역시 상대방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필터 없는 생활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아마 아무도 조언을 안 해준 경우) 자동반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필터가 없는 경우는 본인의 성향 자체이기도 하지만, 관계의 권력구조 또는 관계의 친밀성에서 나타나는 일도 많다.


관계의 권력구조에서 오는 노 필터 현상은 특히 직장에서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상사나 선배의 우월적 직급에서 오는 막말이 바로 그것이다. 조언이라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언어적 폭력이 많다. 조언이라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선해하여 해석하려고 해도, 결국 상대방의 상황과 생각을 100%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조언이 과연 조언이라고 할 만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든다.


보통 조언을 해주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겪어보았거나,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니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주는 조언의 필요성. 일응 맞는 부분이 있다. 유사한 일을 겪어본 사람은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미 수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유사한 일을 겪은 눈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해줄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 역시 상대방이 받아들일 만한 서로의 신뢰관계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나와 상대방이 서로 조언을 주고받을 때 그리고 그 조언이 빛을 발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한 신뢰 관계가 있고, 또한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할 때이다. 그러한 전제가 없다면 일방적인 조언이 되기 쉬우며, 단지 오지랖 내지 참견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현상은 직장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족관계, 친구관계에서도 발생한다. 친구라 함은 여기서 반드시 같은 나이의 친구만이 아니니. 이런 관계에서 말하는 권력구조란 ‘나이’ 일 것이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나이 지극한 사람의 조언은 정말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 전부는 아니라는 결론.


나 역시 나이가 들었다고 나보다 어린 누군가보다 지혜롭다고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다. 물론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의 어느 부분이 별로이지만 또 다른 부분은 멋진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도 듣는 것은 매우 값지다. 미리 경험한 사람이 주는 팁은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화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른답지 않은 어른은 너무나 많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그런 어른. 겉으로는 좋은 말을 내뱉지만 행동과 맞지 않은 사람, 겉으로도 어른답지 않은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 그 유형도 너무나 다양하다.


이런 사람이 조언을 빙자하여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들어야 할까. 그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싸워야 할까. 기본적으로 어른답지 않은 사람은 어른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싸워보았자 변하는 것은 없다. 그냥 감정만 상하고 끝난다. 일단 그런 어른들이 가진 아집이 있다. 내가 너보다 경험이 많아. 많이 겪었어. 그러니 잠자코 듣고 따르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 앞에서 그 말의 모순이나 잘못된 점을 따진다고 해도, 에너지 낭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 변화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면 매우 좋을 것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세상엔 합리적인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결론!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친구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쉬운데, 그래도 친구라면 잘못된 발언에 대해 즉각적인 거부 또는 지적을 해서 바로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너 선을 넘었어.’라고. 친한 친구일수록 친구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더욱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나자마자, 너 왜 이렇게 늙었니? 또는 왜 이렇게 살쪘어? 이런 표현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친구사이에 직언이 필요하더라도.


생각해보니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음.. 친구의 정의도 애매한 것 같다. 예전 어린 시절의 죽마고우라도 현재는 서로 많이 변했을 수 있으니. ‘과연 내가 알던 친구가 지금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같다. 친구와 오랜 세월 동안 일상을 자주 공유하고 많이 이야기해서 서로의 많은 부분과 변화를 잘 알고 있는 경우 그리고 정말 친구와 어느 정도 멀어져 버려 이제는 죽마고우라고 표현하기 애매해진 경우다.


전자라면, 아마 친구는 당신이 뭘 싫어하는지, 뭘 참기 어려워하는지 등등 당신의 성향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어서 선을 넘는 경우는 오히려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후자다.


후자의 경우는 예전에 친하고 많은 일상을 공유하고 생각도 비슷했을 것이지만, 현재는 아니다. 삶의 환경이 달라지고, 하는 일이 달라지면 당연히 사람은 변한다. 물론 그 사람의 성격적인 부분에서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테일에서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취향도 변하고, 만나는 사람도 계속 변하게 마련이다. 입맛도 달라지지 않는가.


그런 친구의 변화를 모르고, 친구가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변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전에 기억한 모습만으로 친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넌 ~~ 하잖아! 네가 뭘 그런 걸 해? 그건 왜 하는 거니 도대체? 이런 식의 말이다.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아니, 생각해온 어떤 전제가 깔려있다. 단정적인 말투와 함께.


일화를 들자면, A가 칼퇴를 하는 직장에 다녀서 취미생활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치자. 취미로 운동, 그림 그리기 등 몇 가지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B가 말한다. ‘그건 왜 해?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그냥 영어공부 해’라고 한다면. 그냥 친구로서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조언이었을까. 그건 당시 상황, 둘의 배경 등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대화의 상대방이 왜 그런 취미를 하게 되었는지부터 묻는 것이 가장 베스트일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야 진심 어린 조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대강 듣고 나서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쏟아놓는다.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중심인 것처럼. 그런 모습을 보면, ‘그래. 세상의 중심은 다 자신이겠지’하며 반포기 상태로 들으면서도,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나도 저렇게 안 하도록 항상 조심해야겠구나’이다. 나 역시 언제든 그럴 수 있으니까.


요즘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차치하더라도, 그 유명한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은 대화의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바쁜 세상에서 실제로 경청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다. 어디서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항상 그대로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신앙을 가지면서 변하는 경우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나쁜 습관을 없애도 금방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다. 특히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나쁜 점’이다. 사람은 나쁜 것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는 만큼 나쁜 점, 단점들은 참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반면 좋은 점은 쉽게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가끔 보면 조언이라며 쉽게 툭툭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표현 그대로 말을 던지는.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내가 그렇게 말해주면 좋을까요?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는 걸 알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다. 그들은 어차피 타인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혹은 이해할 의지도 없는.


그러나 필터 없는 말은 그대로 날아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작게든, 크게든.

예전에는 그런 말을 듣고 엄청난 데미지를 입곤 했다. 며칠간 몸이 긴장한 상태가 되고 가슴도 답답했다. 이름하여 화병인가. 그런데 이런 일을 이제 30년 넘게 살면서 겪어보니, 그 화살은 나의 가슴이 정면으로 박혀 큰 상처를 내지는 못한다.


무뎌졌기도 하고, 내가 단단해진 것 같다. 그런 말에 좌우되지 않게 된 것. 설령 그 말을 듣는 순간 신경이 거슬릴지언정 그로 인해 속상하거나 슬프지 않다. 그냥 또 이런 일이 생겼네? 하는 생각과 그 말을 한 사람의 심리적 불안감 또는 자격지심 등등에 대한 연민도 생긴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이야기할까. 화는 나지만 연민이 생긴달까. 본인도 본인 컨트롤이 안되니 얼마나 불쌍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 대화가 오간 다음날과 그다음 날 정도까지 문득문득 생각이 나며 대화를 곱씹게도 되고, 화도 나고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그 말은 상대방을 건드리는 나쁜 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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