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침묵으로도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원숭이의 꼬리는 없지만 꼬리가 잘리면 고통스럽다는 걸 안다.
직접 느끼지는 못해도 '알기 때문에' 고통을 이해한다. 중요한 건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알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갈등과 고민이 아닌데도 내가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침묵으로 지켜봐 주며 신경 써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야말로 우연한 행운이다.
더욱이 그런 사실을 내내 몰랐다가 갑자기 알게 된 순간은 충격과 각성이 함께 온다.
그 순간이야 말로 타인의 시선과 생각의 주파수가 나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에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어떤 친구(딱히 붙일 호칭이 없다)를 알게 된 지 2년이 넘었다. 하지만 서로 일하는 영역과 성별이 달랐기에 소통할 기회도 없었고 서로 살갑게 구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일대일로 소통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의외로 얘깃거리는 많이 나왔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존중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갔던 거 같다. 그때 완곡하게나마 내 갈등과 정신적 압박을 내비쳤는데 그 친구도 내가 겪는 스트레스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해결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말을 해야 한다고. 지난 2년간 서로의 개인적인 내적 갈등에 대해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내비친 내 속마음에 공감한다는 게 너무 감회가 새로웠다. 마음의 온도가 몇 도 올라간 기분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여자들은 공감을 해야 감성적 소통이 잘된다라는 공식 아닌 공식에 나도 대입된 건지 아니면 남녀의 차이를 넘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따져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에, 나름대로의 작은 정의가 (그 친구로 인해) 바로 섰다는 것에 대한 확신 때문인지...
확실한 건 그동안 내가 겪는 어떤 문제에 대해 그친구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그 친구는 존재 자체로도 내게 힘이 되었다
표현하는 행위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에 교차점과 충돌을 만들지만 말없는 침묵이야 말로 언어적 표현 외의 수단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암묵적인 교감과 추측으로 두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거리를 측정한다. 가끔 음파탐지기로 수심을 측정하듯 어렴풋이 상대방의 무언의 신호와 눈빛을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난 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와 그 친구는 고양이와 개처럼 다르니까. 개는 고양이만큼 물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고양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 보다. 적어도 알았기 때문에 배려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개는 고양이를 배려하기 위해 굳이 고양이가 될 필요는 없다.
언어적인 형체가 없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와 일부분을 공유하는 그 친구의 생각은 침묵이라는 베일 뒤에 숨어 있었다.
진작 언어적, 문자적 수단으로 서로 소통하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침묵이 방해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서로의 생각과 각자 겪는 어려움을 더 미묘하게 이해하는 감각을 기르는 수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10. Jul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