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석 열차표 예매와 경쟁사회

인생의 다양한 선택지 알려주기

태어나 처음으로 명절 열차표 예매에 도전해 봤습니다. 맹장염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된 터라 추석엔 평소 3~4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시댁을 승용차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인터넷 지식검색을 통해 명절 열차표 예매 성공 노하우를 검색하고 수차례 모의 예매연습도 했습니다. 드디어 9월 2일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집에 있는 PC 중 가장 속도가 빠른 노트북을 열고 네이버 표준시계 창을 띄운 다음 오전 6시가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신속하게 로그인하기 위해 코레일 사이트 회원번호를 손가락으로 수차례 연습했습니다. 네이버 표준시계가 5시 59분 50초를 가리킬 때부터 소리 내어 카운트 다운하면서 6시 정각이 되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예매하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오~ 마이 갓!'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분명 6시 정각에 클릭했는데 예매 대기자 수가 '15,200명'이었습니다. 대기시간 59분이라는 표시가 떴습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웬일이니? 동시에 눌렀는데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한 사람에게 주어진 예매 제한시간은 3분이고 3분 안에 예매를 완료하지 못하면 자동 로그아웃 되어 다시 대기자로 넘어가는 시스템입니다. 순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잔여좌석 조회'버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해 둔 열차 편이 이미 매진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잔여좌석'을 통해 다른 열차 편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무심코 그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예매하기' 코너로 돌아오니 이제는 예매 대기자 수가 '25,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줄 서기 대열에서 이탈한 꼴이 된 것입니다.


점점 예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느낌이 들자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던 제 자신이 한심해졌습니다. 20분쯤 지났을까요? 예매를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대기자 수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제 차례가 왔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그인하자 남아있는 표가 추석 당일날 아침 표 밖에 없었습니다. 예매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3분이 지나갔습니다. 다시 기다렸다가 접속한 후 어쩔 수 없이 추석 당일날 아침표를 예매했습니다. 올라오는 표는 전열차 전좌석이 이미 매진이었습니다. 결국 올라오는 건 고속버스를 예매했습니다. 이렇게 생애 첫 명절 열차표 예매는 성공도, 완전 실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명절 열차표 예매처럼 수요가 공급보다 월등히 많으면 손가락 '절대 신공'이 필요할 만큼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꽉 막힌 고속도로 대신 빠르고 편안하게 고향에 데려다 주는 KTX는 누구나 예매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경쟁에 노출됩니다. 수능시험, 입사시험, 임용시험 등 진로를 결정해 주는 여러 시험들도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는 중요한 경쟁입니다. 지난 9월 9일부터 15일까지 대학별 수시전형 원서접수가 있었습니다. 수험생들이 저마다 가고 싶은 학교와 학과에 합격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냈습니다. 인기 대학의 인기학과는 경쟁률이 평균 70대 1에서 100대 1까지 훌쩍 넘어갑니다. 그곳에 합격하기란 좋은 시간대의 명절 KTX 열차표 구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경쟁률만 보면 도대체 누가 합격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예매하기 버튼을 6시 정각에 눌렀다고 생각했는데도 먼저 누른 사람이 15,200명이나 되었던 것처럼 수험생들에게도 물리쳐야 할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열차표 예매는 실패해도 쉽게 단념할 수 있지만 수능시험은 몇 년간의 땀과 노력이 담겨있기에 다들 간절한 마음으로 좋은 결과를 염원합니다.


사실 명절에 건강하기만 하면 꼭 KTX가 아니어도 고향에 가는 방법은 많습니다. 막히더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으레 그러려니 하고 가다 보면 결국은 고향에 도착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고향에 모여서 가족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입니다. KTX를 타고 가서도 가족들과 싸우고 다툴 수 있습니다. 10시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운전하고 가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수능시험일이 이제 53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시 주변에 수험생이 있으신가요? 우리 아이들이 겪어 낼 입시도 귀성길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KTX처럼 단번에 합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탐구하는 시간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걸 찾는 아이들이 긴 인생길에서 조금 더 행복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인생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베테랑 형사 vs 베테랑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