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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예뻤다

아이들은 열두 번도 더 변한다

요즘 방영 중인 TV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를 보신 적이 있나요? 여주인공 혜진(황정음)은 어릴 때는 엄마를 닮아 아주 예뻤는데 사춘기를 거치며 아빠에게 물려받은 악성 뽀글 머리와 홍당무 얼굴, 주근깨 투성이의 잠재적 유전자가 뒤늦게 발현되어 못생긴 외모로 변해버렸고, 남자 주인공 성준(박서준)은 어릴 때는 키도 작고 뚱뚱하고 소심하여 혜진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에게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였는데 사춘기를 거치며 근사한 청년으로 변하게 됩니다. 두 주인공이 성인이 되어 재회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그녀는 예뻤다'로 과거형인가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되는 사춘기는 신체변화는 물론 성격, 말투,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이 함께 변하는 시기입니다. 그 변화가 당사자인 아이에게도, 지켜보는 어른에게도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부쩍 까칠해지고, 퉁명스러워지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때가 많아집니다. 몇 년 전 제 딸이 사춘기 정점을 찍던 '무서운 중2 시절'에 보인 변화는 대체로 이랬습니다.


매사에 짜증이 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버럭 화를 냈다

집에 있는 동안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부모와의 대화를 기피했다.

자기 방에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문 잠그는 횟수가 늘어났다.

외모에 관심을 가지며 입을 옷이 없다고 옷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생일선물 준비와 생일카드 작성에 무한정 시간을 썼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인터넷 기사거리에 신경 썼다.

부모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아이가 친구와는 방문 잠그고 몇 시간째 계속 전화 통화를 했다.

말이 거칠어졌다.

학교 교칙을 하나 둘 어기고 준비물이나 숙제를 놓치기 시작했다.

공부하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작스런 변화를 견디기 힘들어진 저는 아이를 붙잡고 달래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고, 소리 지르며 야단쳐 보기도 했지만 한동안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날도 한바탕 딸과 설전을 벌인 후 허탈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거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얼마 전 발견해 바탕화면에 저장해 둔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습니다. 딸이 유치원생이던 6살 무렵에 찍은 아빠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영상 편지였습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이 다음에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에게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요. 이 다음에 효도 많~~이 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동영상 속 딸은 사랑스러운 멘트와 천사 같은 미소를 날리며 연신 손하트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이쿠 저럴 때가 있었구나. 저렇게 예쁜 짓을 하던 때도 있었어. 효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효도를 공약하던 때가 있었어’

가슴 한 편이 아릿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사랑스러운 저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반달 같은 눈웃음을 날리던 아이는 왜 집을 나간 채 여태 소식이 없는 걸까?’ 눈물 줄줄 흘려가며 동영상을 돌려보던 저는 서러운 감정에 복받쳐 마침내 ‘꺼이 꺼이’ 소리까지 내며 울었습니다.

그때 거실 건너편 방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울고 있는 저를 힐끔 처다 보며,“어이없어. 왜 저래?” 퉁명스레 한마디 던지고는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물병을 꺼내 벌컥 벌컥 물을 마신 뒤 다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아이. 동영상 속 딸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무서운 중2 딸이 또하나 있었습니다. 사춘기 소용돌이 속에 있는 ‘그녀는 참 미웠습니다.' 반면 동영상 속 여섯 살 ‘그녀는 예뻤습니다.’


지금 사춘기 자녀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두 가지를 기억해 보는 건 어떨까요?

첫째는 내 아이가 예뻤던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는 것이고요.

둘째는 자녀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엄마가 예쁘고 다정하게 말했던 시절, 아빠가 멋지고 믿음직스럽게 아이를 대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춘기 가정에서는 자녀를 바르게 가르친다는 명분하에 잔소리와 일방적 지시가 난무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잔소리로 자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버릴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강을 무사히 건너려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예뻤던 시절, 다정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열두 번도 더 변합니다. 사춘기 방황도 한철입니다.

다시 짠하고 멋지게 나타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행복한 가을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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