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무대가 있다
지난 10월 18일에 있었던 제 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당당히 1위로 입상한 21살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일 화제입니다. 조성진 덕분에 국내에 때아닌 클래식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내년 2월 2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릴 예정인 '쇼팽 콩쿠르 입상자 갈라 콘서트'는 티켓 예매 시작 50분 만에 2,500석 전 좌석이 매진되었고, 11월 6일 발매 예정인 '2015 쇼팽 콩쿠르 우승 실황 앨범'도 인기 스타 아이유의 새 음반을 제치고 종합 판매 차트 1위에 올라섰습니다. 조성진의 콩쿠르 예선과 본선 연주가 담긴 유튜브 동영상은 현재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에 그다지 조예가 없는 제가 들어도 그가 갈라 콘서트에서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e단조 1번'은 깊어가는 가을과 어우러져 눈물이 주르륵 흐르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조성진 덕분에 쇼팽의 음악과 삶, 그가 사랑한 조국 폴란드까지 재발견하게 되는 신기한 일이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성진이 가히 클래식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국제 콩쿠르에 입상해야만 주목해주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현실을 꼬집는 비판적 시각도 있고, 우승자에게 과도하게 호들갑을 떠는 '1등 지상주의'가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조성진의 우승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쇼팽'을 들을 수 있고 클래식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이 반가웠습니다. 특히 '먼 친척 중에도 음악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조성진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을 통해 음악영재로 발탁되어 사회가 함께 키워낸 인재라는 점이 더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많은 스타들의 뒤에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매니저를 자처했던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자식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 감독하며 성공을 위해 매진하도록 독려했던 부모들에 비해 조성진의 부모는 수상자를 발표하는 현장에도, 그 흔한 언론 인터뷰에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아들의 음악인생을 응원할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조바심 내지 않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 평범한 부모 덕분에 조성진이 더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성진의 우승 소식과 연주 실력, 그의 어른스러움을 접하면서 자식 키우는 부모들은 다들 부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방향을 뚜렷이 정하고 한 길로 매진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기량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은 조성진처럼 내 아이도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박세리의 LPGA 우승을 보면서 골프를 시작한 '세리 키즈'들이 많았듯이 어쩌면 이번 조성진 우승으로 동네 피아노 학원마다 몰려드는 수강생으로 호황을 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에 보낸다고 누구나 조성진처럼 될 수 는 없습니다. 스케이트 강습을 받는다고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샛별처럼 빛나길 바라지만 현실은 은하수 무리 중의 하나 임을 아프게 확인하게 되는 시기가 옵니다. 초등 저학년까지 이것저것 배우게 했던 예체능에서 자녀가 그다지 신통한 재능을 보이지 않으면, 부모는 이제 믿을 건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초등 고학년이 되어 공부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 부모는 학원 스케줄 관리와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사춘기 자녀와의 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아들러가 '미움 받을 용기'에서 말한 '과제분리'가 되지 않은 부모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이름하에 온갖 간섭과 조종을 시작합니다.
김연아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손열음, 조성진이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꼭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서울대나 하버드대를 가야만 성공한 인생은 아닙니다. 정말 성공한 인생은 자신이 스스로 꿈을 찾아 그 과정을 즐기며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는 삶일 것입니다. 스스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모색하고 꿈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오롯이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이 진짜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지수 세계 1위 덴마크는 중학교 졸업 후 1년, 고등학교 졸업 후 6개월, 성인들은 자유대학에서 쉬어가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인생학교'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쉼표'의 시간 동안 진로 모색은 물론 인간적 감수성과 상상력, 시민의식 등도 기른다고 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인생학교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읽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꿈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아이들을 믿어주는 어른들이 더 많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는 조금씩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이런 자조 섞인 용어들이 마음을 짓누르는 시대입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조차 묻지 않고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 세상에서, '금수저'를 물고 나오지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을 더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세상에 보여주기 시작한 조성진이 그래서 참 멋집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언젠간 자신만의 무대가 펼쳐지는 날이 오길 마음으로 응원해 봅니다.
이상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어울리는 11월의 첫날 신은하의 일요편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