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법
촘촘하게 짰던 여름휴가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휴가 첫 날인 지난주 월요일 아침부터 배가 아팠습니다. 위장약 복용, 핫팩 찜질만 거듭하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이 명치에서 오른쪽 하복부로 내려가는 게 느껴지자 한 밤중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CT 촬영 결과는 맹장염 소견이었습니다. 화요일 새벽에 입원해 오전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의 말로는 맹장의 염증이 생각보다 심했고 장과도 협착되어 떼어내는 과정에 생긴 천공으로 수술시간도, 회복기간도 남들보다 두 배 이상 길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주일간 입원실에 갇혀 꼼짝없이 누워 있으려니 내 의지대로 내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만이 스쳐 갔습니다. 오늘은 그 곳에서 깨달은 이야기와 사춘기 이야기를 일요편지에서 함께 나눌까 합니다.
우선 처음 든 생각은 '세상에 아픈 사람이 정말 많구나'였습니다. 아파보니 아픈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제가 입원했던 곳은 외과병동이라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기계에 손가락 잘리고, 오토바이 타다가 실려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병원에 있어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고단함이 보였습니다. 간병인들과 문병 오는 사람들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은 치열한 일상에서 잠시 열외 된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작은 세계였습니다.
그 다음 든 생각은 '소중한 것은 어려울 때 분명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동안 새삼 가족, 특히 부모, 남편, 자녀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내 일처럼 가슴 아파해 주고 눈물 뿌려 기도해 주는 사람들은 주로 이들이었습니다. 나머지는 한두 번 위로하는 것으로 끝나고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범주의 가족은 진정한 내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앞으로 더 잘 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친구 또한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누구였는지를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몰골을 그대로 보여줘도 될 만큼 문병을 왔으면 좋겠다는 친구와 내가 굳이 알려서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은 친구를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지기를 병실로 불러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소담 소담 나누었습니다.
세 번째 깨달은 사실은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위대한 성취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다'는 점이었습니다. 도움 없이 몸을 움직여 일어나 씻고 먹고 화장실 갈 수 있는 일상과 좋아하는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는 건강을 잃어보기 전에는 그저 당연한 것이었으나 병원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있던 며칠 간의 저에게는 가장 위대하고 부러운 것이었습니다. '재벌도 건강을 잃으면 VJ특공대에 나오는 범부의 소소한 행복이 그저 부럽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의 일주일이 제 삶의 우선순위까지 바꾸었습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성취해야 할 명예나 목표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욕심을 덜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병원은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억지로라도 보게 한 인생훈련소였습니다.
병실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MBN TV의 '엄지의 제왕'이라는 건강 관련 프로에서 인간 생애주기를 25살 간격으로 100세까지 4주기로 나누고 1주기(1~25세)에 건강을 위한 기초체력을 제대로 갖춰놓지 않은 사람들이 2주기(26세~50세)까지는 어떻게든 버티지만, 2주기에도 아무런 대비를 해 놓지 않은 사람들은 3주기(51~75세)부터는 골골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프로에서는 '병(病) 살과의 전쟁'에서 숨쉬기 운동만 제대로 해서 속근육만 회복시켜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제법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었습니다. 건강을 잃고 헤매던 제가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춘기 자녀로 인해 갈등을 겪는 집들의 특징이 이 건강 원리와 비슷한 듯합니다. 자녀와의 애착형성이 필요한 사춘기 이전에 저처럼 맞벌이나 기타 다른 사유로 소소한 관계근육과 신뢰근육을 키워놓지 못한 채 사춘기를 맞이하면 그 누구보다 혹독한 사춘기 홍역을 치를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시작된 뇌 변화와 호르몬 작용으로 자녀들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면 부모들이 당황하게 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 사춘기 시기를 부모와 자녀가 현명하게 잘 보내야 자녀를 건강한 성인으로 독립시킬 수 있습니다. 숨쉬기만 잘 해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처럼 사춘기 자녀에게 숨통을 튀어주고 자신 안의 갈등과 불만을 표출하고 해소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주기만 해도 한결 사춘기를 보내기가 수월해집니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비온(Bion)과 한국의 청소년 전문가 김현수님이 이 시기에 '부모는 자녀의 쓰레기통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면 맹장염에도 위장약만 먹으면서 핫팩 찜질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를 키울 때도 자녀의 행복과 부모의 욕심을 혼동하면 자녀와의 관계가 깨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은 본질입니다. 자녀의 자존감과 행복도 본질입니다. 본질을 지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본질을 잃고 나면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소중한 것은 있을 때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건강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