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년 만에 자유를 얻다.
어서 와, 백수는 처음이지?
“젠장.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남편과 술을 마시다 내린 결론이었다. 나의 직업은 난임연구원이었다.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직업. 절에 다녔던 엄마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직업이 흔한 것이 아니라며 네가 한 모든 선행이 자식에게 다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러면 뭐 하는가 자식이 좋아지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나는 고등학교 수능을 치고 나서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뒤로 한 달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20살이 되면 용돈은 벌어서 쓰라고 했던 말을 끊임없이 들어서였는지, 고등학교 때 덕질 할 돈이 모자라 허덕거려서였던 건지 가늠은 할 수 없지만 암튼 난 틈틈이 계속 일했다. 그렇게 대학원까지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남들이 한 번은 한다는 휴학도 하지 않았다. 휴학이 뭔가 부모님 졸라서 간다는 어학연수나 유럽여행조차 다녀오지 않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는데 하필 난임연구원이었다. 한 2년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새로운 것도 배우고 아이를 갖기 힘든 부부들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도 좋았다. 못 쉬어도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괜찮았다. 여행을 안 다녀 보고 쉬는 법을 몰랐으니 가끔 쉬는 날은 지인이나 애인과 술을 마셨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렇게 14년이 지났다. 중간에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병원으로 이직도 했다. 돈이 안되면 인력을 뽑아주지 않는 악덕 병원이어서 그렇지 남들이 보기에는 꽤나 괜찮은 자리였다. 문제는 환자들의 호르몬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고 일은 나 혼자 해야 하는 것에 있었다. 환자의 호르몬에 따라 시험관아기 시술 일정이 잡히고 시술이 시작되면 5~6일 정도 꼬박 출근을 해야 한다. 수요일에 시술이 시작되면 수목금토일을 나와야 하는 거다. 절대 쉴 수 없었다. 병원은 충원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돈이 안된다는 이유 하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정말 열심히 했다. 다른 집 아이들을 위하느라 우리 집 아이들을 내팽겨둔 채였다.
그러다가 진심으로 화가 터졌다. 새로 온 의사가 일요일에 배아상태를 전화로 듣더니 갑자기 배아 이식을 해야겠다며, 자기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서울이란다. 5시간 정도 걸리니 어디 가지 말고 병원에 있으라고 했다. 일요일. 그리고 그날은 우리 아빠의 생일날이었다. 자기는 5일 동안 휴가 가서 쉬었으면서 나는 본인 진료 보는 날 쉬지도 못하게 해서 그런 걸까. 너무 못 쉬어서 핀트가 나간 걸까 아무튼 그날 나는 들이받았다. 대학병원은 병원이 나에게 돈을 주지 의사가 돈을 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2달 뒤 나는 일을 그만뒀다. 한 달에 2~3일 쉬는 것도, 해외여행 하다못해 국내여행조차 급하게 예약하느라 다른 사람들 2배 되는 가격으로 호구여행을 다녀와야 하는 것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기간 동안 계약직만 쓰려는 병원덕에 사람을 못 뽑아 출산휴가만 3개월 쉬고 그것조차 중간에 한 번씩 나가야 했던 것도, 연차를 1년에 고작 2개 쓰는 것도, 몸이 버티지 못해 졸음운전을 하는 것도 그만뒀다.
그렇게 나는 워킹맘에서 경단녀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돈 대신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를 찾는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