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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술한 공작새 Apr 24. 2019

자유에 적응하는 법

까미노 7일 차-원할 때 쉬어가기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왔다. 오늘 하루 걷든 말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고, 일어나는 시간과 잠에 드는 시간도 자유롭다. 알람 같은 것은 맞추지 않는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걷고 생각하고 먹고 마신다. 이것이 처음 길을 시작할 때의 나의 다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도 은연중에 스스로 속박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오늘 깨달았다. 어제 한 한국분과의 대화에 취해서 돌려놓은 빨래를 말리지 않았다. 중간에 알베르게 매니저분이 오셔서 퇴근한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할 즈음에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하지만 사무실 문은 닫혀있었고 세탁실은 열려있었지만 건조기는 사무실에서 바꿀 수 있는 특수한 동전으로만 이용이 가능하다.     


 젖어있는 빨래를 들어보았다. 5kg는 족히 나갈 것 같았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첫째, 이 빨래를 그대로 짊어지고 30km, 행군. 17kg도 모자라 20kg가 넘는 짐을 지고 간다? 생각만으로도 첫날 다친 발목이 시큰거렸다. 둘째, 빨래를 들고 다음 코스로 점프. 머릿속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음성이 패배자라고 외쳐댔다. 셋째. 하루를 더 쉰다. 머릿속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12월 2일에 첫 여정을 시작했고 오늘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로그로뇨까지 도착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보다 하루 뒤쳐져 있다. 하루가 가지는 의미가 언제부터 이렇게 컸는지 몰라도 오늘따라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게 아닌데 하며 되뇌었다. 걸을 때 걷고 쉴 때 쉬는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왔다. 그 누구도 속박하지 않는데 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옥죄고 있었는가. 12시 반에 대치동에서 수업을 마치고 샌드위치 하나를 입에 물고 2시까지 목동으로 가기 위해 바삐 지하철을 타는 것이 한국에서의 일상이었다. 목동에서 수업이 끝나면 다시 어디든 들어가 밥을 먹고 또 다른 아파트로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이동해야 했다. 일과가 다 끝나고 안암역 영철버거에서 시원한 생맥주로 해방감을 만끽해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위해서는 적어도 1시에는 잠에 들어야 했다.      


 이곳에 와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 원하는 속도로 걷고, 몸이 원하는 곳에서 쉬고, 밥을 먹고, 다시 몸이 원하면 일어나 걸으면 된다. 첫날에 걸음이 빠른 동행을 쉴새없이 따라가다 수레 미는 노인을 보고 동행과 발맞추어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지치면 쉬어갈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아직 계획에는 얽매여 있던 나였다. 계획은 그 자체로 속박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은 계획하지 않을 자유를 얻어보려 한다. 이번에는 내가 차고 있는지도 몰랐던 족쇄 하나가 땡그랑 하고 땅에 떨어지는 기분이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얽매이고, 정신없이 계획에 맞추어 살아가겠지. 그러나 자신이 열쇠를 가지고 족쇄를 차는 것과 열쇠가 없는 족쇄를 차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야생의 호랑이는 길이 들어도 야성을 잃지 않는다. 반면 처음부터 동물원에서 길이든 맹수는 야생 적응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동물원에 갇혀 있었다. 이번 순례는 숨겨져 있는 야성을 끄집어내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다. 잘 짜인 계획이 주는 안정감에서 탈피해 자율이 주는 자유와 불안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삶을 살았다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랑스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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