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지적 전투력이 생겼다.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떠한 강박의 일종으로 단지 다이어리에 이번 달에는 5권, 다음 달에는 10권, 목표 달성을 표시하기 위한 순전히 숫자 놀음이었다. 이렇게 올해의 목표 100권을 채우는 미션을 클리어했을 때 '나 한 해에 책 100권이나 읽은 사람이야!'라고 얼마나 거들먹거리고 싶었는지 점점 요령만 늘어났다.
10분이면 거뜬하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리스트를 채운다던가 눈을 대각선으로 쭉쭉 뻗으며 어떤 단락은 통째로 건너뛰어 놓고는 '오늘도 한 권 다 읽었군.' 하면서 수첩 구석에 체크를 한다. 두껍거나 자간이 너무 빽빽한 책들은 가볍게 중도포기를 하고 가독성이 높은 책들로 대체한다.
연체는 이 모든 계획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연체를 하게 되면 그 일수만큼 대여가 중지되는데 그건 마치 착착 굴러가는 수레바퀴가 엇나가 삐그덕거리면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이러다 이번 달에 목표치만큼 다 읽지 못하면 어쩌지? 올해의 계획이 어긋난다면? 만약에 올해 읽은 책이 아쉽게 94권으로 끝나면 어디 가서 100권 읽은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닐 수도 없고... 참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식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는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 있었다.
그런데 지적 허영을 한번 부려보겠다고 빌려온 헤르타 뮐러의 책 때문에 이 금기사항이 깨지고야 말았다. 얼마나 안 읽히던지 이미 반납해야 하는 기한은 다가왔는데 다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기운과 어떻게든 읽어 보겠다는 의지가 사투를 벌였다. 결국 꺼이꺼이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그 사이 대여 중지자가 되어 버렸다.
도서관에서 당분간 책을 빌릴 수 없다니... 책을 못 빌린다고 하니 책을 구경하는 것조차 신나지 않았다. 앉아서 다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책들을 도중에 두고 와야 하다니 흐름이 끊기는 것에 대한 우려는 곧 우울감으로 변질됐다. 텅 빈 손으로 의자에 앉았다.
차분한 공기와 쿰쿰한 냄새, 옅은 소음들과 정렬된 책장 속 책들. 오랜만에 책이 아닌 책장 사이사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매직아이를 할 때와 같은 4차원의 세계에 빠진다. 쓱 옆에 앉으신 할아버지도 나처럼 그냥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계신다. 눈을 뜨고 명상을 하는 기분이랄까. 고작 몇 분을 멍하게 앉아 있었을 뿐인데 고요가 찾아왔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가만히 있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멍은 참 오랜만이지? 눈을 뜬 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적이 언제였을까?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다음은 뭐지 그다음은? 그리고 그다음은? 무의식적으로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내일의 또 내일까지 생각하는 게 습관을 넘어 일상이 되어 있었다.
도서관과 멍은 최고의 궁합이다. 최적의 온도와 감각을 선물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왜 이러고 있냐고 정신 좀 차리라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도서 부류 주위를 서성이다 눈치껏 자리를 잡는다. 눈은 약간 정면보다 높게 먼산을 보듯 응시한다. 종이 냄새에 집중한다. 잠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