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내가 선물을 준비했지!"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엄마가 주섬주섬 핸드백에서 립스틱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찐 분홍 색깔의 립스틱, 하나는 아주 찐한 초록색깔의 립스틱이었다.
"어우 이런 걸 어떻게 바르고 다녀?" 놀란 것도 잠시
"초록색으로 나오는 거 아니야. 입술에 이렇게 바르면 촉촉하게 분홍색으로 바뀌어. 넌 촌스럽게 그런 것도 모르냐. 너희 엄마가 더 세련됐다. 그러지 말고 한번 발라바!"
어쩔 수 없이 입술 위에 몇 번 립스틱을 발랐다. "정말 초록색으로 안 변하네? 촉촉하긴 하다."
입술에 닿은 립스틱은 곧 찐한 분홍색으로 변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화려한 색감이었지만 본인이 아무래도 너무 잘 산 것 같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에게 차마 촌스러운 색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립스틱이 엄마 화장대에서도 나오고 다른 주머니에서도 나오고 도대체 똑같은 게 몇 개가 나오는지 개수를 세다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 도대체 몇 개를 산거야?"
"아니 이거 얼마 안 해. 5천 원 밖에 안 해서 10개 샀어. 나중에 이모도 주고 고모도 두고 친구도 주고 너도 주려고..."
옆에서 대화를 듣는 아빠는 뭘 그렇게 많이 샀냐고 쓸데없는 낭비라고 엄마에게 무안을 주었다.
"10개 사도 그냥 립스틱 한 개 값도 안 해요."
의기소침한 엄마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요즘 한 개에 오만 원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면 싸게 잘 샀네."
처음 보는 브랜드의 립스틱은 새해를 맞이하여 들른 친척집에서도 계속 등장했다.
"고모들아 이거 하나씩 해라. 이거 진짜 촉촉하다."
엄마는 그렇게 고모들에게도 시범을 보여주었다.
고모들에게도 이모들에게도 립스틱 전도사가 되어 하나씩 나눠 주었지만 아직까지 꽤 많이 남아 있는 립스틱을 보며 언제 다 쓸까 걱정을 하다가도 촉촉함을 자랑할 때 의기양양하게 립스틱을 돌려 시범을 보여주는 엄마의 천진난만함이 귀여워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엄마 너무 귀여운 거 같아."
"뭐가?"
"엄마가 립스틱을 돌리며 시범을 보일 때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공감하는 이모들도 귀엽고 그냥 다..."
"별게 다 귀엽단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라미란 배우가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집이 너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데도 기분이 안 좋은 엄마를 보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류준열 배우가 하소연하는 장면이 있다.
이에 이동휘 배우가 엄마는 자기의 도움이 없이 모든 게 잘 되어 있는 게 서운한 거라고 말해 준다. 그제야 원인을 알게 된 아들은 이후 엄마를 연신 부르며 이것저것 엄마가 없으면 안 되는 일들을 일부러 만들어 놓는 다. 극 중 엄마는 이 집에 내가 없으면 어쩔 뻔했냐며 타박을 하면서도 기꺼이 망가진 것들을 순식간에 수습한다. 그리고 미소를 띤다.
만약 내가 "엄마 저번에 립스틱 너무 좋더라. 어디서 샀어? 나도 선물 좀 하게 또 사주면 안 돼?"라고 한다면 엄마는 귀찮아하면서도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종종걸음으로 버스를 타고 화장품 집에서 립스틱을 한 무더기 사 올 것이다. 그리고 꼭 내가 시킨 것만 사 오는 것 아니 아니라 종업원이 좋다며 추천해준 제품들까지 몇 개 더 얹어서 사온 다음 전화를 할 것이다.
"내가 고생 고생을 해서 네가 부탁한 거 사놨어. 그러니깐 주말에 와서 가져가!"
"이런 엄마가 어딨냐? 감사한 줄 알아!" 투덜거리며 덧붙이기도 할 테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나는 이야기한다. "우리 서로 감사해야지." "빨리 서로 감사하다고 말하자"라고 한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도 모두 감사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