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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01. 2020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2020-01-01

맥머트리는 "나는 열두 권의 일기를 빠짐없이 서너 번씩 읽었다. 그리고 평생 옆에 두고 끊임없이 다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제임스 리스 밀른의 일기 열두 권을 서너 번이나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리스 밀른의 다른 책들에 대한 맥머트리의 판단, 즉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책, 나쁜 책, 그저 읽은 만한 책이란 평가는 하나하나를 읽은 후에 내린 평가인 게 분명합니다. p.419.


2020년이 되었다.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미래를 기대했던 부류는 아니라 그런지 조금 시큰둥한 기분이다. 외계인의 존재는 믿지만서도. 며칠 동안 집 밖으로 안 나가고 하는 일 없이 무기력하게 뒹굴거렸더니 별 감흥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새해 첫 날인 오늘은 늦잠을 잤고, 떡국을 끓여 먹었고, 친구와 문을 연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를 두 잔 마셨다. 애써 'New Year's Resolution'을 떠올리자니 그것도 귀찮았다. 나는 정말이지 행복보다는 불행하지 않기를, 그저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p.334-335.) 그래도 내일부터는 아침에 일어나고, 요가를 다시 등록하고, 매일 머리를 감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해봤다. 물론 매일 읽고 일기도 써야지. 이 정도만 하더라도 아주 성공적이겠다. 나머지는 친구의 말처럼 '숨만 쉬어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올해 돼지띠들의 운세가 그렇게 좋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올해 첫 책으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갑자기 서문이 생각 나서다. 며칠 전부터 작가가 그린 저 나무늘보의 이미지가 자꾸 떠올랐다. 자신의 게으름에 진절머리가 나고 화가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하고픈 마음이 기억 속의 이 페이지를 용케 찾아낸 것이다.


책은 우리를 더 높은 곳에 오르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책을 계단의 난간 잡듯 손에 꼭 쥐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한꺼번에 네 단씩 올라가고 숨을 고르기 위해 쉬는 일도 없는 일부 독자와 달리, 나는 느릿하게 올라간다. <파이 이야기>에서 나와 비슷한 등장인물이 있다면, 파이가 아니라 나무늘보이다. 나에게 좋은 책이란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와도 같다. 나는 지칠 때까지 책을 읽은 후에야 배가 불러 잠자리에 든다. 계단의 난간은 나뭇가지에 비교된다. 책을 가슴에 품고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꿈을 꾼다. 나는 느릿하지만 꾸준히 읽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굶주려 죽을 것이다. ~ 나무늘보는 한 단락을 겨우 읽었다.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그 단락을 다시 읽는다. 나무늘보는 그 단락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나무늘보는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 아름다운 이미지이다. 나무늘보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무늘보는 아주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정글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빗줄기 사이로 다른 나뭇가지들에 맺힌 밝은 점들이 보인다. 예쁜 새들이다. 아래에서는 화난 재규어가 앞만 쳐다보며 맹렬하게 달리지만, 나무늘보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자족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늘보는 온 정글이 자신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한다. 폭우는 여전히 계속된다. 나무늘보는 느긋하게 잠든다. p.38-39.


그래서 나무늘보처럼 느릿하게, 유튜브로 작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틀어둔 채로, 책을 읽다가 일기를 쓰다가 하고 있다. 새해 첫날에 라데츠키 행진곡은 들어줘야지, 암만! 그러고 보니 메가박스 생중계라도 예매해둘 걸 그랬네, 아쉬워라. 영상 속 작년 지휘자는 크리스티안 틸레만, 올해 지휘자는 안드리스 넬슨스라고 한다. 아아, 죽기 전에 샤넬 트위드 재킷을 입고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 앉아 신년음악회를 볼 날이 올까. 스물 아홉일 때는 마흔이 되면 그럴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했는데, 몇 년 남지 않으니 초조하다. 흠, 뭐 어쩌겠는가, 이번 생은 망... 아냐, 괜찮아, 아직 몇 년이 남았잖아? 희망을 가져보라고 쫌. 오늘은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나무늘보가 되어 라데츠키 행진곡에 맞춰 발이나 까딱거려본다.


어떤 책이든 거기에 쓰인 내용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해낸다면, 자기검열의 과정이 되어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게 되고, 따라서 좀 더 현명해질 겁니다. ~ 저에게 책은 일관된 속삭임입니다. 그 속삭임이 값싼 무선본으로 전달되든 초기 간행본으로 전달되든 저에게는 똑같습니다. 책은 예술 작품이어서 때로는 문학 이상의 가치를 갖습니다. 따라서 도서관이 아니라 박물관에 있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그렇긴 해도 저는 맥머트리의 개인 서고와 중고서점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저는 서스캐처원 대학교 도서관의 서가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책은 소유한 것이든 빌린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새 것이든 영혼을 살찌우고 지탱해줍니다. 래리 맥머트리도 이 점에서는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2010년 새해를 맞아 책의 문화를 찬양하는 이 책을 즐겁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p.421-422.


+ 책을 읽으면서 오타를 자주 발견하는데, 앞으로는 체크해두었다가 편집자나 출판사에 알려줘야겠다. (위에서도 '~이 점에서는 저는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어서 '저와'로 바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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