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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03. 2020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2020-01-02

살아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사랑의 발명>) p.77.


어젯밤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두 교황>을 보고 자는 바람에 여덟 시 기상은 못하였다. 십오 분 간격으로 촘촘히 설정해둔 모닝콜은 모두 들었지만, 삼십 분만을 거듭 외치다가 몽롱한 상태에서 연거푸 개꿈이나 꾸고 열 시에 겨우 침대 밖으로. 곧 쓰러질 것처럼 배가 너무 고파서 당장 뭔가를 집어넣어야 했다. 그래서 세상 맛없는 오트밀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릴까 초조한 우유를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후 껍질이 시커멓게 되어버린 바나나 두 개를 썰어 넣고 입으로 밀어 넣었다. 하, 건강한(?)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무. 나. 맛이 없다! (이소라 언니 진심 존경...) 아무튼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씻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떡국으로 주린 배를 달랠 수 있었다. 역시 아침을 '잘' 차려 먹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때그때 냉장고도 체크해야 하고, 매일 뭘 먹을지 미리 정해두고, 재료도 준비해둬야 한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내일도, 뭐라도(사과, 토스트, 샐러드, 달걀, 아니면 김에 밥을 싸서?) 차려 먹을 것이다. 쓰레기만 만드는 인간으로서 조금이라도 쓰레기를 줄이려면 열심히 냉장고를 털어야 한단 말이다. 투덜투덜. 어쨌든 아침도 먹었고, 머리도 감았고, 오늘부터 재등록을 결심했던 요가 미션까지 무사히 클리어했으니 성공적인 하루다. 시간표를 보니 전부터 들었던 좋아하는 선생님 수업은 월수금 마지막 타임이네. 오예, 내일 반갑게 인사해야지.


비록 늦잠을 잤지만 영화를 보고 잔 나를 칭찬한다. 기대 이상이었다. 나야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종교를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상관없지 뭐. 게다가 연초에 'Holy'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더없는 선택이 아닌가 말이다. 두 교황이 축구 경기를 보는 유쾌한 그림을 비롯해 좋은 장면과 대사가 많았지만,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고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 베네딕토 교황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던 부분이 특히 그랬다.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던 바티칸이 순간 고요해지고, 그곳의 모두가 '남'을 위해 기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침묵으로 가득한 장면에서 울어버렸다. 어쩌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갑자기 음모로부터 풀려나거나, 직장으로 복직하게 되었거나,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신이 강림하여 절망에 빠진 그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화자가 그에게 동정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절망에 빠진 그를 바라보다가, 화자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 다름 아닌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기에,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그는 사랑을 발명한 것이다. 신형철이 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과 사랑은 동의어이다. 이리하여 이 시는 단지 술집에 절박하게 마주 앉아 있는 연인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 같은 이야기가 된다. p.78-79.


책에서 작가 어설라 K.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철학자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그리고 맹자의 '우물에 빠진 아이' 실험을 언급하는 부분에서(p.79-86.) 영화 속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이 겹쳐졌다. (아, 참고로 이 책은 논어 에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모두의 잘못입니다." 아아 교황님, 우리가 인간이라서 그렇겠지요! 


그러니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라고 한 가브리엘 마르셀은 타당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 그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당신은 죽지 않아도 돼! 신형철에 따르면,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뜻인 동시에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존재해야만 해! 즉 이 사랑은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맹자 역시 이러한 동정심의 실현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생각했다. p.82.


책을 반쯤 읽었는데 밑줄 치거나 귀퉁이를 접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예 하지 않았다. 실실 쪼개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읽다가 수수가 자꾸만 머리를 들이밀어서 덮어뒀다. 얼른 마저 읽고 싶은 동시에 곱씹으며 천천히 읽고 싶기도 해서. 수수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제자리에 있구나 하고. 좋은 글이란, 어른이란,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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