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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07. 2020

잊기 좋은 이름

2020-01-06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 그러나 나중엔 나조차 거기 왜 줄을 쳤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p.238-239.


어젯밤에 김치비빔국수를 만들어 잔뜩 먹고 잤더니 아침에 뭐를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레몬티를 한 잔 마시고 할 일을 좀 하고 다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겨울비가 오려고 날이 우중충해서 기분은 가라앉는데 집중은 잘 되는 날씨. 쌓아놓은 설거지도 하고 요가도 다녀와 다시 책을 펼쳤다. 그동안 뒷부분을 읽기 힘들어서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방금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2019년 여름 김애란'. 잘 기억해두려는 이름, 잊기 싫은 이름 중 하나다.


뒷부분을 왜 읽기 힘들었냐며는 자꾸 눈물이 나서다. 나는 원래 잘 우는데, 그래서 "뉴스를 보다가도 운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때' 이후로 그런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팽목항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낮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몸 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p.258.'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이제 2020년이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듣다 책상에 그만 고개를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 노래는 그런 노래가 아니고, 아무도 나더러 그 대목을 그렇게 들으라고 일러준 적 없는데, 나도 모르게 얼굴이 젖었다. 어떤 단어 하나에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그때서야 나는 내 속의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걸, 어느 시점 이후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전부터 수백 번도 더 불린 노래가 동시대 누군가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 다 아는 이야기를......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하나. p.280.


지지난 달, 전부터 가보고 팠던 카페에 갈 때 이 책을 들고 갔었다. 시청 쪽 빌딩 17층에 있는 카페라 전망이 좋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고 시끌벅적했다. 달달한 커피를 한 잔 앞에 두고 그 웅성거림 속에서 집중해 책을 읽다가 자꾸 멈췄었다. 생소한 단어, 웃음 나는 풍경, 아름다운 표정, 갖고 싶은 재능...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 타입은 아니지만, 연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자꾸만 잊어버리는 말들을, 글들을, 이미지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둘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게라도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밑줄을 긋고 또 그을 것이다.


+ 책에서 언급된 베르톨트 브레히트, 귄터 그라스, 헤르타 뮐러의 이름도 (괜히) 한 번 적어둔다. 아, 그냥 장바구니에 담아두면 되겠네! 그럼 알라딘으로 이만 총총.

++ 아, 지난번에 얀 마텔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의 책 리스트에서 얼핏 <길가메시>를 보고 마동석 배우를 떠올렸는데, 무식한지고! '<길가메시>는 호메로스보다 앞서고, <성서>보다 앞선 이야기입니다. p.260.' 부끄러워하며 부랴부랴 검색해봤는데 적당한 책을 찾을 수가 없다. 책에서 다룬 스티븐 미첼의 번역판이나 데릭 하인스의 번역판을 번역한 것도 없고, 연구를 많이 한 국내 작가가 쓴 것은 품절. 흐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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