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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Dec 13. 2019

겨울방학

2019-12-12

사장은 영업 뛸 사람이 부족하다는 영업부장의 말을 듣고 이찬양 씨를 뽑았다. 하지만 영업부장은 이찬양 씨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영업부장은 자기 일을 김 과장 아닌 다른 사람과는 나누기 싫어했다. 자기가 쌓아 온 리스트와 노하우를 공유하면 언젠가는 배신당하리라고 확신했다. 경력 사원을 뽑아놓으면 일하는 스타일이 구려서 같이 못 해 먹겠다고, 거래처 다 떨어져 나갈 판이라고 대놓고 배척했다.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 일머리가 없어서 성가시다고 잘라 버렸다. 그래 놓고 회삿돈은 자기 혼자 다 벌어 오는 것 같다면서 우는소리를 했다.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는 이찬양 씨의 등을 보면서 나는 지겨운 환멸을 느꼈다. 저 사람은 왜 저토록 조용히 나가는가. 어째서 나가는 순간까지 영업부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가. 저 사람은 왜 석 달을 버텼나.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을까? 여기서 나오는 돈으로 살고 싶었나? 그럼 나는? p.31.


잠들기 전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긴 했다. 눈뜨자마자 스파게티를 삶을 물부터 올렸다. 세일할 때 사둔 바질 페스토가 있겠거니 했는데 토마토소스가 있길래 얼른 병을 땄다. 멋있는 다니엘 헤니가 광고하는 바로 그 브랜드 - 폰타나 - 소스였다. 작은 프라이팬에 삶은 면을 가득 붓고 소스를 넣어 비빈 후,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토마토 몇 개를 잘라 얹고 파마산 치즈 가루와 파슬리 가루를 약간 뿌려 냄비째로 아니 프라이팬째로 식탁에 올려두고 '흡입'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 순간부터 빈 프라이팬을 개수대에 넣기까지 30분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격렬하게 배가 고플까, 끼니를 거르는 편도 아닌데, 탄수화물 중독자라 그런 걸까,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실은 특이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아아 요리사랑 결혼하면 너무 좋겠지, 어릴 때 남편감으로 점찍었던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님도 괜찮은데,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쉴 새 없이 포크를 입에 가져갔더랬다. 물론 멋있는 다니엘 헤니가 광고하는 파스타 소스니까 맛은 기가 막혔다.


요리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한, 소꿉장난 같은 음식이라서일까. 책 표지의 그림과는 어쩐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인다. 김민재 어린이(아마도)의 그림이다. 아이들의 그림이 좋아서 사촌동생이 어릴 때 - 지금은 예비 대학생 - A4 종이에 그린 그림을 잘 보관해둔 적도 있다. 찾아보면 어느 박스엔가 들어 있을지도. 온갖 종이 못 버리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일기장이며 스크랩북은 물론이고 학창 시절 친구들이 건넨 쪽지, 옛 연인이 남긴 메모 같은 것까지 하나도 못 버리겠는 거다. 까딱하면 종이 추억 호더가 될 판. 아 또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네. 아무튼 이 책은 <해가 지는 곳으로>로 눈물을 쏙 빼놓았던 최진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오늘은 열 개의 이야기 중 앞의 두 이야기를 - 돌담, 겨울방학 - 읽었는데, 과연 최진영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길 잘했구나, 하고 머릿속으로 느낌표를 콕 찍었더랬다. 그리고 두 이야기에 모두 지금의 내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도 같다. 묘하게 두 이야기 속에 내가 있잖아? 환멸을 느끼고 퇴사한 나. 겨울방학의 고모처럼 사는 나. 퇴사하고 겨울방학을 맞이한 나.


그래서 남해 근방으로 이사를 간 이나의 고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작은 책방 주인이라도 되었을까? '그 나이 되도록'이라는 말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씩씩하게 지낼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 겨울방학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벌새>의 김새벽 배우가 이나의 고모 역할을 하면 딱이겠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해보는 겨울방학 중인 나다.


 그날 밤 이나는 이불 속에서 고모에게 '체르니 100번'과 수빈이 얘기를 했다. 고모는 내일부터 같이 피아노를 배우자고 했다.
 같이?
 응.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어.
 고모는 피아노 쳐 본 적 없어?
 응. 난 피아노 못 쳐.
 근데 고모랑 어떻게 같이 배워?
 학원에서 배우면 되지.
 고모도 학원에 갈 수 있어?
 그럼. 갈 수 있지.
 어른인데?
 어른도 배울 수 있어.
 우리 엄마는 중국어 배우는데. 그거 해야지 회사 계속 다닐 수 있댔어.
 응. 어른도 계속 배워야 되나 봐.
 잠들기 직전에 이나는 고모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 텐데. 이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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