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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Oct 26. 2020

아우구스투스

2020-10-26

...하지만 오랜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지금도 이 일기 첫 구절을 쓰면서, 그 누구보다 괴팍한 독자, 나 자신만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토록 머뭇머뭇 적절한 화제를 찾고 그 위에 논리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가! 적합한 논지, 논지의 구성, 효과적인 배열, 심지어 일화들을 드러낼 문체까지. 그 필력으로 진리로 이끌어야 할 상대도 나 자신이며,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할 대상도 나 외에 아무도 없건만. 어리석다. 하지만... 해가 될 것도 없겠다. 나는 하루 종일 글에 빠진다. 내가 머물러야 하는 이 섬, 해변 바위와 백사장에 부서지는 파도를 세듯. p.200.


며칠 전 서른몇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두드러기가 났다. 온몸 곳곳이 붉게 부어오르고 가려웠다. 특별한 음식을 먹은 것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건만.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그랬다. 하긴 살면서 마주치는 온갖 일들이 그렇지 뭐. 짧고 극심한 공포가 지나가자 이런 일이 '도대체, 왜, 내게 일어나는가!' 하는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물론 내가 억울하거나 말거나, 두드러기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정된 후에도 두어 번 정도 더 나타났고 아직 피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원인도 모른다. 결과가 나온다 해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만성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2020년은 너무도 엉망진창이라서 달력이 두어 장 남은 지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고지서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긴 했다, 고 여기다 한 번쯤 쓸 수는 있겠다. 사실은 만사가 심드렁했지만 그래도 뭐든 해보려고 용기를 냈으며, 아니 용기를 내는 척이라도 했으며 그럴 때면 시시한 일조차도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이를테면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핑계. 그런 핑계라도 있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핑계들을 한껏 끌어모아 곧 얼어붙을 세상의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일기를 쓰지 않은 지난 몇 달 동안은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대신 음악을 들었다. 바흐를 듣고 베토벤을 듣고 슈만을 들었다. 밤마다 그렇게 겨우 잠에 들었다. 잠이 안 올 때도 책을 펼쳐보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쩌다 떠오른 생각도 아무렇게나 흘려보냈다. 다시 읽고 쓰고 싶어진 것은 갑자기다. 두드러기처럼 그냥 문득.


언제나 그랬지만, 친구들의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정은 귀하고 소중하다.


그래서 마치 타인처럼 내 삶을 들여다보며 슬픔과 멀어진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았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이제 완전히 슬픔이 끝난 것이다.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다만 사랑했던 사람들마저 개의치 않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 이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알량한 호기심마저 그저 담담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이 글에 그간 배운 장치들을 채택하는 이유도 이 위대한 무관심으로의 추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아니, 그럴 개연성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저 거대한 바위들을 밀어 비탈 아래 어두운 근심의 바다에 빠뜨리는 쪽이 쉽겠다. 심지어 내 의심에도 관심이 없지 않은가.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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