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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Oct 27. 2020

그르니에 선집 1 섬

2020-10-27

오후에는 침대 위에 가 엎드려서 앞발을 납죽이 뻗은 채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잔다. 이제는 흥청대며 한바탕 놀았으니 아침 일찍부터 내게 찾아와 온종일 이 방에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때다 싶은지 여느 때 같지 않게 한결 정답게 굴어 댄다. 피곤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p.36.


아침으로 딸기 크림치즈를 바른 토스트와 커피를 챙겨 먹었다. 두드러기도 이틀 째 잠잠하고, 잠도 푹 잤다. 어젯밤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과 26번 '고별'을 들으며 <아우구스투스>를 마저 읽었다. 임동혁 피아노 리사이틀 '베토벤에게' 실시간 중계 영상을 밤 11시까지만 볼 수 있다고 해서 저녁 무렵부터 틀어두었다가, 이후에 예프게니 키신의 음반으로 이어 들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도 베토벤의 음악도 대단했다.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대서 병원에 갔는데 다행히 알러지는 없었다. 가장 걱정되었던 고양이 알러지도 괜찮았다. 가뿐한 마음으로 고양이들을 보러 나설 수 있었다. 사료와 간식을 챙겨주고 한참을 놀다가 책을 펼치자 또 고양이가 등장했다. 하, 고양이 뭘까...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것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때에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대체 고양이 따위에 어떻게 흥미를 느낄 수가 있을까, '문제' 속에서 살고 정치, 종교, 혹은 그 밖의 '사상'을 가진, 사유하고 추론하는 인간에게 그런 따위의 주제가 합당하기나 한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제발 사상을 좀 가져 봐요! 그렇지만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 점이 바로 고양이와 그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p.54.


이런 글을 읽고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잠이 몰려와서 따뜻한 바닥에 누웠다. 잠깐의 달콤한 낮잠이었다. 물론 꿈같은 건 꾸지도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고양이들은 거기 있었다. 바로 내 눈 앞에.


황혼 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소진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내 불안을 달래 다오." 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잠이 그대를 삼킬 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따져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 - 나는 무섭다.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 장치조차 없다.'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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