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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Aug 08. 2021

집과 산책

2021-08-07

책을 읽는 즐거움, 청소의 산뜻함, 아침의 클래식, 건강한 입맛,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 휘둘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 산책의 기쁨,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 확실한 취미생활 그리고 꾸준히 일기 쓰기 같은 목록들은 포기할 수 없는, 제 마음속 유산 리스트입니다. p.54.


꿈을 꾸다가 여섯 시에 눈을 떴지만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다. 아홉 시가 조금 못 되어서 겨우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고양이 세수만 한 뒤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실내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햇살 쨍쨍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오늘은 두 번째 수업. 야외에서 수업받을 때가 시간도 더 길고 신나긴 했지만, 날씨 탓 안(못)하고 일대일로 집중해 배울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다 싶다. - 게다가 한강 테니스장에서 하던 수업은 아예 없어진 모양 - 아무튼 지난주 수업에 이어 포핸드만 계속하고 있는데, 힘이 너무 들어가고 스윙 자세가 엉망이라(역시, 뭐든 예뻐야지) 답답하다. 마음은 급한데 공치는 타이밍은 또 늦어서 계속 지적을 받았다. 하, 그렇긴 하지만 재미는 있다. 다음 달에는 상황을 봐가면서 주 2회 수업을 등록해야지. 여전한 '테린이'는 땀을 흘리고 나니 괜히 기분도 좋고, 땀을 흘린 김에 좀 걷고 싶어 져서 돌아오는 길에 부러 집을 지나쳐야 나오는 카페까지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원두도 사들고 왔다. 사망 직전인 아보카도 두 개와 토마토 하나, 일부러 주문해둔 고수까지 넣고 알뜰살뜰 과카몰리를 만들어 아침을 먹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서둘러 침구 교체, 세탁기 돌리기, 청소와 설거지와 수수보리 돌보기, 음악 듣기와 목욕과 온라인 장보기와 핸드폰 쳐다보기에 이어 차돌박이 찜으로 저녁 차려 먹기, 사온 원두로 드립 커피 내려 먹기까지 하고 났더니 그새 깜깜한 밤. 특별한 일 없이도 이렇게 하루는 잘도 지나간다.


어쨌든,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매 순간 다짐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농장을 운영하셨던 덕에 유년 시절 넓은 농장 들판과 땅은 제 앞마당이었습니다. 매일 싱싱한 알을 낳아주는 닭들, 낳자마자 죽은 아기 소를 바라보며 흘리는 어미 소의 눈물, 대형견 세인트버나드의 등에 올라타 학교 가자고 조르던 즐거움, 고집스럽게 말 안 듣는 염소들을 혼낸 기억, 산양 젖을 짠 직후 고소함과 따뜻함을 맛본 일, 두 마리로 시작해 나중엔 100마리도 넘어버린 토끼들, 그 토끼들에게 겨울에도 채소를 먹이고자 언 땅의 배추를 작은 손으로 호호 불어가며 뽑던 기억, 사육장을 뚫고 나온 징글징글한 칠면조의 뜀박질 등 저의 유년 시절 기억은 온통 맨발로 누볐던 땅과 동물들의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유년 시절의 따스하고 그리운 기억은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집안일을 사랑하고 집 자체를 좋아하면서도 산과 들로 나가 뛰놀던 경험은 성인이 된 저에게 산책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산책을 하며 사유하고 자연을 맛보는 것이 제겐 큰 행복입니다. 집과 일상을 사랑하고, 순간을 아끼는 행복한 어른이 되는 것이 매일 저의 다짐이랄까요.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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