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30
영이, 이 밤과 그 다음에 다가올 낮과 밤들을 잘 맞이해 주기를 바라오. 또 햇빛이 내리거나 구름이 덮이거나 비와 눈 내리는 정원에서도, 항상 머리를 하늘에 우러르고 그 마음을 영원에 물으면서,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인지를 가만히 생각하며.
그럼, 영이. p.145.
을지로의 직장인이 나오라고 해서 명동교자로 점심 - 물론 나에겐 아침 - 을 먹으러 갔다. 약속 시간에 종종 늦는 것이 미안해서 나름 서두르고, 행여나 길이 엇갈릴까 싶어 '본점'에서 보기로 하고 지도까지 미리 공유했는데 '또' 기다리게 만들고 말았다. 시간은 딱 맞춰 도착했는데 '분점'으로 간 것이다. 나에게 짜증이 샘솟고야 만다. 바보 같으니! 그러나 헷갈릴 만도 하다며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주어서 마음이 금방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먹는 칼국수 맛은 그대로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실 별일도 아닌데 - 만남과 약속과 실수와 그럴 수도 있지! 의 상황 - 왜 그렇게 혼자 감정이 요동쳤나 생각해봤다. 약속 시간에 자주 늦고(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뻔한 길도 잘 잃어버린 채 종종 패닉이 되곤 하는 스스로가 진절머리가 나서 일 수도 - 아, 그렇다고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시라, 그리고 많이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 또 그런 상황에 어른답게, 차분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일 수도. (이렇든 저렇든 '자기혐오'인가 싶네.) 다른 누군가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의 실수가 아주 큰 잘못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해서인가. 물론 상대를 탓할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예민한 사람인데, 내가 멍청하게 왜 그랬을까, 화내고 나무랄 만도 하지, 자책을 하다가, 내가 일부러 혹은 상습적으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원망도 하다가. 그때 얼른 사과하고 상황을 해결하려고도 해봤지만 - 어리석게도 수없이 전화하고 굳이 찾아가서 기다리고 - 돌아온 것은 (당연하게도) 거절과 무응답이었다. 한심하기도 하지. 나는, 당신을 괴롭히려던 게 아니라, 아까워서 그랬다고, 그날 유독 아름다웠던 날씨와 우리의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그랬다고, 나중에도 차마 대답을 못했다.
작은 가방을 메고 나가느라 작은 책을 챙긴 것도 있지만, <느티의 일월>은 을지로의 직장인이 논현동의 직장인이던 시절에 나에게 선물한 책이라서 부러 들고나갔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적은 많아도 선물 받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아서 더 소중하다.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뒷부분이 더 좋네. 시인이 '영이'하고 부르니 마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고.
영이, 무서움 없이, 쭈뼛쭈뼛함 없이 생을 모험하오. 여자의 생이 따로 규정지어 있는 게 아니오. 인간으로의 모험, 체험, 지식, 꿈, 행복, 불행, 모두 힘껏 모험해 봐요. 그리고 작은 일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말고 좀 더 인간적인 소중한 일에 마음을 쓰기 바라오.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