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31
이 세계를 분명하게 볼수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기묘하게도 거의 입을 다물고 있게 된다.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p.209.
어젯밤 고양이들과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 '콤마퀸'의 책을 마저 읽다가(정말 흥미진진하다) 제임스 설터의 이야기에 잠시 멈췄다. 그는 심지어 '콤마'에 관련된 챕터에서 등장했다. 제임스 설터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나도 몇 개쯤 -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지만 - 가지고 있지. 콤마들 사이에서 생각이 하염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무튼 책에 따르면 제임스 설터는 필명이고 본명은 제임스 호로위츠. 처음 안 사실이다. - 그의 필명은 속취가 나면서도 (salter의 뜻은 '제염업자') psalter(시편)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p.139. - 콤마퀸이 직접 편지를 보내 교열자가 보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콤마에 대해 물어봤을 때, 설터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구두점 하나도 이유 없이, 허투루 쓰지 않는 작가. 그 편지에서 설터가 "<스포츠와 여가>의 콤마는 더 낫습니다."라고 말하며 끝을 맺었다고 해서 아침에 눈뜨자마자 책을 꺼내 펼쳤다.
낮에 처리할 일이 있어 밖에 나가 걸어 다녔는데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오월의 마지막 날. 이제 여름이네. 더위에 약해 늘 여름이 싫었는데,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호불호가 무슨 상관인가 싶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터의 책은 여름에 읽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겐 여름이면 생각나는 책이 몇 권 있는데 <알리와 니노>가 대표적이다. 작년 여름에 낡았지만 너무나 편안했던 남의 집 소파에서 마저 읽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도 그 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여름은 책 읽기 좋은 계절이지, 암만.
아마 제임스 설터와 같은 작가들의 책을 번역한 사람들도 구두점 하나까지 고민하고 또 했겠지. 지나칠 수 없는 그 어려움을, 고통을, 잠시 헤아려본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뚝딱 번역을 하는 세상이 온대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이란 게 그런 것일까. 원서로 그 맛을 알아채며 읽어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미지들. 창문과 소파와 식사와 표정과... 그런 것들이 너무나 화사하게 찔러대서 한동안은 어떤 이야기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읽다 만 책 중간 즈음에 영수증을 꽂아두었네. 빛이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