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

2018-06-08

by a little deer
사람의 마음을 북돋는 것. 글 쓰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가벼운 오락거리를 쓰는 사람도, 충격을 주기 위해 쓰는 사람도,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쓰는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글을 쓰는 까닭임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알지만 부정하려는 사람도 있다. 감상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스스로 감상적이라 자백하게 될까봐, 비난받을까봐 부정한다. 무슨 까닭인지 요즘 사람들은 감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 글 쓰는 사람 중에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한 사람도 있다. 마음을 더 천한 샘과 기관, 활동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람의 마음을 북돋으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쓴다. p.184-185.


윌리엄 포크너의 '서문'이라는 글이다.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후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한 작가.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을 - 아마도 - 처음으로 읽어본다. 어쩌면 이렇게 글이 간결하면서도 쉬이 읽히면서도 힘이 있을까! 과연, 하고 감탄이나 한다. 책에 윌리엄 포크너의 글이 한 편 더 실려 있어서 당장 펼쳐본다. '그의 이름은 피트였습니다'는 다른 스타일의 글이지만, 역시 좋다. 키우던 강아지가 누군가의 차에 치여 죽은 사건을 너무도 담담한 듯이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정작 읽는 사람은 가슴이 미어진다. 아이고.


나는 (아마도 지금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쓰는 사람'인 것 같다. 한낱 일기에 불과한 글이지만, 그래도 왜 쓰고 싶고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보자면 그렇다. 일기장이나 다름없지만 굳이 공개해 둔 이유도 계속 쓰기 위해서다. 무엇이라도 읽고 또 쓰기 위해서. 그래도 언젠가는 바닥 끝까지 내려가서 아주 솔직하게 쓰고 싶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러기를 바라는 - 심지어 의도하는 - 작가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북돋우려는 희망과 욕망을 끝까지 분석해보면 전적으로 이기적이며, 완전히 개인적이다. 글 쓰는 사람은 바로 자신을 위해 사람의 마음을 북돋우려 한다. 그렇게 해야 죽음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북돋우려는 마음들로 죽음을 물리치고 있다.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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