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2018-06-15

by a little deer
시끄러운 그늘.
그 아래에서 걸어간다, 너에게로.
가는 길에 그는 날씨조차 잊어버린다. 내가 너를 떠나고 난 뒤, 이 세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라는 공간은 너와 나만을 허락한다. 네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세계. 그러니 내가 너에게로 향하는 순간, 심지어 내가 너를 정말 만난 적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순간, 나 역시 이미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어디, 다른 별의 사람. 너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순간, 이 모든 순간들은 나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p.76.


출근해서 일하는 척 - 이틀째라 아직 업무 파악 중이니까 -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꽃 배달이라고요. 3층에서 얼른 뛰어내려 가 받은 꽃이 너무도 화사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살며시 들고 올라와 책상 아래 곱게 두고 카드를 읽어 봤다. '날마다 크고 작은 행복이 함께하는 새 출발이길 진심으로 기도하며. 사슴, 축하해!' 세상에, 이토록 마음이 환해질 수도 있구나,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점심 때는 햇볕이 따가웠지만 등 뒤에 열어둔 창문으로는 종일 바람이 슬슬 불었다. 회의, 회의, 인수인계, 메일, 메일, 회의. 하지만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룰루루 하고 콧노래를 불렀다네. 자매님과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야 다시 펼쳐보는 책. 팔랑대다가 이 페이지에서 한번 멈춘다. '다만 꿈꿀 수 있는 시간만이 나에게는 있으리라. 그러니 소녀 같은 바람이여, 너도 나다. 이 도시의 아침에 푸른 반지를 걷다가 가질 수 없는 방의 꿈을 꾸는 나는 너이고 이렇게 설레는 무력한 나 또한 너다. 푸른 반지는 이어지고 우리의 무력한 욕망은 푸른빛에서 죽고 그러다 다시 살아난다, 푸른, 푸른, 이 고요하고도 시끄러운 그늘이여. p.80.'


책장을 넘기면서 대책 없이 까불거리던 마음이 점점 차분해진다. 그리고 또 한 번 멈춘다. '그러니 떠난 사랑들이여, 당신들이 남기고 간 물은 인공 호수가 되어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에 머물고 있음을 아시라. 어떤 사랑도, 비참하게 배반된 사랑마저도 사랑이었으므로 그 사랑의 마음이 물처럼 흐르던 동안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삶은 살 만했는가. 물은 흐르고 사랑은 그 밑에 고여 흐르지 않는다. p.223.' 화병에 옮겨 꽂아둔 꽃을 보고 또 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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