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화장실에 갈 때면 시집을 읽었다.

by 꼬마거인

우리 아빠는 국어선생님이었다. 집에는 오래된 책들이 많았다.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국어국문학, 문학평론, 국어교육에 관한 책들이 책꽂이 한 구석에 얌전히 쌓여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것들이 그저 근엄한 벽돌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시절, 집에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읽었던 나는 읽을 걸 찾던 중 정말 지루해 보이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국어교과서 작품 읽기 시리즈였다. 아빠가 수업용 교재로 사놓은 책인 듯했다.

당시의 나는 화장실에 갈 때면 무조건 책을 들고 가야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앞의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정직한 제목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수록한 모음집이었다.

중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로 시리즈가 나뉘어 있었으며,

시, 소설, 수필 부분으로 각각 책이 따로 나와 있었다.

그중 내 마음을 빼앗긴 건 시 모음집이었다.

나는 시를 좋아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들만 골라 읽곤 했다. 나태주, 김소월, 서정주, 박노해 등.

그때의 나는 함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소위 있어 보이는 주류의 시들을 좋아했다.


이 책에는 원래라면 찾아 읽지 않았을 법한 형식의 시들도 많이 실려 있었다.

한문시, 시조, 그리고 수필처럼 기다란 내용의 시들.


별생각 없이 펼쳐 든 책이었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서 나는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시의 또 다른 면면들을 맛볼 수 있었다.


더불어 학습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임에도 시에 대한 해설이 그리 길지 않으며

시를 보는데 불편함이 없게 나뉘어 있다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보는 시들을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방해물 없이

하나하나 음미하는 것은 새롭고 신나는 일이었다.

다만 가끔은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릴 적의 나는

7-80년대 한국의 어려웠던 시절이 담긴 시들을 읽는 걸 불편해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서러운 그 시대의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그러한 시 역시 처음에는 건너뛰며 읽었다.

하지만 2번 3번 4번 다시 읽을수록 건너뛰었던 시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기형도, 함민복, 백석, 안도현 시인의 시들.

그들의 작품들을 읽으며

특별하고 빛나는 표현들 없이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내어도

빛날 수 있음을, 울림을 줄 수 있음을 배웠다.


그렇게 이 시리즈는 당시의 내게 날마다 화장실 메이트가 되었고

자연스레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글밥이라는 말이 시 부문에서도 통용되는 말이라면

나와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는 시의 글밥들은 여기서 대부분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중 몇 편의 시만 고르는 일은 참 어려웠지만

당시의 나와 함께했던 책에 수록된 시들을 몇 편 소개해본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이성선 / 사랑하는 별 하나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 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 대추 한 알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나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 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정호승 / 폭풍






마음의 고향은 이제
첨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노오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이시영 / 마음의 고향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 저녁에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 묵화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는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신경림 / 눈 온 아침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 엄마 걱정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안도현 / 우리가 눈발이라면





나 서른 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 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안도현 / 애기똥풀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산(山)은 녯 산이로되 물은 녯 물 안이로다.
주야(晝夜)에 흘은이 녯 물리 이실쏜야
인걸(人傑)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안이 오노매라.


황진이(黃眞伊) / 산은 옛 산이로되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 별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김기택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 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 수라(修羅)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시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맑은 날
초록 둑길에
뉘 집 아이 놀러 나와
노란 발자국
콕 콕 콕
찍었을까


이응인 / 민들레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淸江)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영천이씨(정몽주 어머니) / 까마귀 싸우는 골에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내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우 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물게 하오
이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나그네와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 내 마음은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 / 호수







즐거운 날 밤에는
한 개도 없더니
한 개도 없더니
마음 슬픈 밤에는
하늘 가득
별이다
수만 개일까
수십만 갤까
울고 싶은 밤에는
가슴에도
별이다
온 세상이
별이다


공재동 / 별






지하철 보도 계단 맨바닥에
손 내밀고 엎드린
거지 아저씨
손이 텅 비어 있었다.
비 오는 날에도
빗방울 하나 움켜쥐지 못한
나뭇잎들의 손처럼

동전 하나 놓아줄까
망설이다 망설이다
그냥 지나가고,

내내
무얼 잊어 버린 듯…….
집에 와서야
가슴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거지 아저씨의 손처럼

마음 한 귀퉁이
잘라 주기가 어려운 걸

처음 알았다.


박두순 / 처음 안 일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 구부러진 길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거야


허영자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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