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전쟁: 1.작가편
어느 예능 작가님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스타 예능 프로듀서들과 두루 작업을 경험했던 그는 그들의 공통점을 '잘 듣는 사람'이라 말했다. 사전회의뿐만 아니라 촬영 중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발생한 때에도 후배 프로듀서들이나 작가들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한다고. 드라마계 스타 감독들도 '잘 듣는 사람'일까?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드라마 감독, 작가는 그 반대였다. 그들이 성공한 이유는 주변의 이야기를 잘 수용해서라기보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드는 능력과 감각이 남들보다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을 밀고 나가서 성공을 만들어낸다. 탁월한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잘 듣지 않는다.
드라마 감독, 작가는 전부 안하무인이라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유머러스하고, 배려심이 깊고, 섬세하다. 이름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그렇지 않은 사람 중 일부가 기분을 심하게 망치는 게 문제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관해서라면, 어떤 감독이나 작가도 어느 정도는-사실 굉장할 정도로-독단적으로 변한다. 그 이유는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드라마는 작가의 작품이다,라고 할 만큼 작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대본을 작가가 쓰기 때문이다. 작가 한 명이 대본 전체를 완성한다. 최근에는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왕왕 있고, 보조작가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스타 작가가 크리에이터란 이름을 달고, 자신의 제자들을 작가로 키워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작가 한 명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집중되어 있는 구조를 뒤흔들 만큼 일반화되지 않았다. 여전히 드라마 대본은 작가 한 사람의 손 끝에서 탄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제작의 초기 과정에는 편성과 캐스팅이 있다. 편성과 캐스팅의 순서는 모든 작품마다 다르지만, 그 기준은 하나다. 대본. 제작 프로듀서는 작가와 함께 대본 개발 작업을 거친 뒤, 기획안과 대본(주로 1~4부)이 준비되면 편성과 캐스팅을 시작한다. 이때 필요한 기획안과 대본을 쓰는 작업은 보통 1년이 넘게 걸리며, 길어지면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알 수 없다. 채널과 OTT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매니지먼트와 배우가 출연을 선택하는 기준은 대본이다. 당연하다. 대본이 재미있어야 드라마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대본이 기깔나야 배우가 후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드라마의 성패를 온전히 떠안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날 밤부터 다음 날 아침 시청률이 공개될 때까지 잠을 못 잔다는 어느 작가님의 인터뷰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당신이 드라마 작가라고 생각해보자. 16부작 드라마가 편성되었고, 현재 8부 촬영이 한창이다. 대본은 12부까지 나와있고, 이제 13부 초고를 완성했다. 이 작품만 해도 벌써 3년째 붙들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 대본은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재미있으니까. 이전 대본을 초라하게 만들면 어쩌지 싶다. 뿌듯한 마음으로 대본을 제작사에 넘겼더니 웬걸, 제작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느니, 초반에 비해 지루해졌다느니 하며 수정을 요청한다면 당신은 어떨까.
"아 그렇군요~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이 작품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은 저로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일이니 함께 수정을 해보아요!"일까. 아니면 "이 작품은 내 작품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든 내 새끼야. 네가 뭘 안다고 까불어? 자신 있으면 네가 써봐."(물론 절대 이렇게 말씀하시는 작가님은 없었다, 절대 절대 절대로) 일까. 내가 작가라도 후자의 마음이 들 것 같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종이 한 장으로 시작해서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는 작품을 누군가 지적한다면 감히? 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지적한 사람이 감독일지라도 말이다.
자동차 설계도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뛰어난 공정 기술이 있어도 좋은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대본과 드라마의 관계도 같다. 대본에 문제가 있으면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 감독은 좋은 대본으로 망작을 만들 수 있지만, 나쁜 대본으로 역작을 만들 수는 없다. 대본이 재미있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래서 감독은 드라마 대본에 손을 댄다. 편성 단계에서 작품에 합류한 감독은 작가와 정면으로 대립하곤 한다.
감독과 작가가 함께 대본을 수정하는 과정은 전쟁이다. 설득과 회유와 침묵과 논리의 언어가 총칼을 대신한다. 하나의 전투-남자 주인공이 매력이 없어요, 이래서 시청자들이 보겠어요? 인물 서사부터 다시 만들어봅시다-가 누구의 승리인지, 또 다른 전투-가장 중요한 미스터리를 8부가 아닌 4부에 공개하라구요? 절대로 안돼요-가 누구의 패배인지 대본에 기록된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제작 프로듀서는 주로 새우등 터지는 역할을 맡는다. 사실 이 전쟁은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이 전쟁의 진짜 무기는 언어가 아니라 '필모그래피'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성공한 작품을,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왔는가. 누가 더 많은 시청자에게 선택받아왔는가. 그에 따라 전쟁의 성패는 이미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