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자
고생은 프로듀서가 하자
촬영이 끝나고 한동안 드라마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스태프들의 고생이 보였다. 상상 속 그들의 모습에 내 얼굴이 오버랩되곤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 주인공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설정 : 저 옷은 누가 관리했을까, 의상팀? 배우 매니지먼트? 너무 비싸 보이는데. 결국 제작 PD였을까?(물어물어 알아보니 제작 PD였다)
- 시장을 가득 메운 상인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들 : 시장 사람들까지 전부 섭외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빈 시장을 빌려서 세팅한 건가? 사람들이랑 물건들을 전부? 에이 설마.(설마가 아니었다)
나는 야외 촬영이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대로변이나 골목길에서 주변을 통제하고 촬영을 진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차량들을 막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제 갈 길 잘 걷는 사람을 붙들고 죄송하지만 오분 정도만 기다려 달라거나, 급하게 이동하는 차 앞을 가로막고 다른 길로 돌아가 달라고 할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혔다. 내가 무슨 권리로 이들의 길을 막는 것일까, 드라마가 뭐고 촬영이 뭐라고.
촬영장은 정상적인 상태(도로를 달리는 차량, 길을 걷는 보행자)를 비정상적 상태(멈춰주세요, 돌아가 주세요, 죄송합니다)로 바꿔야하는 현장이었다.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그림을 만들어내야 하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 누군가의 등하교 길이 주인공들의 이별 장소가 되고, 멀쩡한 아파트가 잔혹한 사건의 배경으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특성을 시민들이 아는 것도 아니며, 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불편을 이해해 줄 이유도 없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뒤집는 일을 주로 맡았던 나는 항상 속이 타들어갔다.
"머리 쓰지 말랬지?"
나는 선배의 그 못된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머리를 쓰지 말라고? 머리는 따로 있으니 손발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움직이면 된다고? 웃기시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야외 촬영 중에 사람들을 통제할 때에는 종종 그런 일이 벌어졌다. 촬영장에서 차를 막던 연출부 한 명이 골목길 가운데 서서 경광봉을 번쩍 치켜들고 차들을 등진 채 서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뒤로 차들이 빼곡히 서있었지만 그는 컷 싸인이 나올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운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을 248963214896번쯤 반복하고-물론 거의 비슷한 횟수만큼 욕을 먹고-나서 그는 결국 뇌 스위치를 껐다.
드라마는 하나의 세계다. 현실 세계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간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길을 걸을 때,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보조 출연자)은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멋진 배우라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모인 실내 공간에서도, 말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주인공뿐이다. 주변 인물들은 소리 없이 입만 뻥긋뻥긋한다. 드라마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현실과 다른 법칙을 부여한 것이다. 아무리 잘생긴 배우라도 쳐다보지 않는다, 주인공 빼고는 소리 내지 않는다, 처럼.
야외 촬영장은 현실 세계와 드라마의 세계가 충돌하는 현장이다. 그 경계에서 정상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의 뇌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간다. 대신 새로운 기능이 생긴다. 시키는 일을 해내는 것. 그 일이 무엇이든, 언제든, 어떻게든.
촬영장은 수직적이다. 촬영 감독이 "렌즈 55로 바꾸자"라고 말하면 "왜요? 지금은 45가 딱 좋은데요?"라고 답하는 촬영 팀은 없다. 포커스 풀러가 "렌즈 55!"라고 말을 전하면 카메라팀 퍼스트, 세컨드가 이어서 "55요"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각각의 팀은 그 수장(주로 감독이다)의 지휘를 따르며 이러한 전체 촬영팀을 움직이는 사람은 연출 감독이다. 그러니 감독이(머리가) 촬영 중에 지시하는 사항은 수행해내야 한다.
슬픈 것은 촬영 팀이나 조명 팀처럼 각자의 역할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는 팀에겐 역할에 맞는 일이 나름의 합당한 방식과 이유로 주어지지만, 제작 프로듀서에게는 항상 예상치 못하고 난해한 문제들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그 "머리"가 언제나 똑똑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은 슬픈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