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무슨 일 하세요, 하는 질문에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라고 대답하면 열에 아홉은 질문을 반복한다.
"그럼 무슨 일을 하세요?"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는 돈을 쓰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질문에 이런저런 대답을 해봤지만, 결국 제작 프로듀서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대답은 '드라마를 만들 때(주로 촬영 시) 필요한 모든 돈을 쓰고 관리하는 사람'이다. 내가 겪은 고난과 역경은 대부분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의 본질이 돈을 쓰는 사람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돈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갑인데, 뭐가 힘들다는 거야?'라고 물어볼 수 있겠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을 들고 있는 사람'은 제작사 대표이고, 제작 프로듀서는 그 돈을 사용해서 촬영을 진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제작 프로듀서는 돈을 써서 촬영을 진행시키는 사람인데, 그 돈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맨 몸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막연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다음은 내가 인턴 시절 촬영 현장에 투입된 첫 번째 날에 겪은 이야기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도착한 촬영지는 서울 모처의 주택가였다. 동기들과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인사를 드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들고 어느 공사장 앞에 있었다.
"병주 피디는 *슛 돌면 공사를 잠깐만 멈춰 달라고 해."
내게 처음 주어진 임무였다. 촬영 중에 배우들의 대사 이외의 소음이 녹음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촬영팀의 사정일 뿐, 공사장은 작업자들에게 엄연한 생업의 공간이었다. 그들은 협조 요청을 무시한 채로 작업을 진행하기 일쑤였다. 소음으로 촬영이 지연되자 선배 프로듀서가 달려왔다. 그리고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공사장을 조용히 만들었다.
*슛 shot. 촬영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영상 녹화와 음향 녹음이 진행되는 순간을 말한다. 연출이 '액션'을 외치고, 배우가 연기하고, 다시 연출이 '컷'을 하는 사이를 촬영장에서는 "슛이 돌고 있다"라고 한다.
선배는 친절하게도, 제작 프로듀서가 촬영 현장에 와서 공사장을 통제하러 뛰어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제작 프로듀서는 촬영이 진행되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소음이든, 어떤 문제든 촬영이 지연되면 제작 프로듀서가 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촬영이 지연되면 촬영 일수가 늘어나게 되고, 촬영 일수가 늘어나면 당연히, 제작비가 늘어난다. 제작비가 예산안을 초과하는 것은 우리에게 실패다.
'촬영이 진행되는 조건'을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1) 돈을 쓴다. 2) 몸으로(주로 내 몸이다) 때운다. 제작 프로듀서들은 많은 경우 몸으로 때운다. 제작비는 항상 빠듯하기 때문이다. 그날 선배는 사실상 제작 프로듀서란 직업의 본질을 나에게 설명해줬지만, 그땐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당장에 주어지는 일을 처리해내는 것에만 급급했다. 촬영 장소를 옮기게 되어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물론 나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공사장 앞에 서있었다), 나처럼 당장 일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내 동기들이 보였다. 동기들은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버린 담배꽁초를 제대로 수거하지 않으면, 동네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와서 다음번 촬영 진행이 어려워진다. 내 동기들은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고, 그 옆을 지나던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그 동기 둘은 나란히 연대, 고대 졸업생이었다.
제작 프로듀서는 돈을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돈(제작비)은 한정되어 있고, 촬영 여건을 방해하는 다종 다양한 문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작 프로듀서란 직업이 고달팠다. 직업의 본질도 모른 채로 촬영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을 때, 위 에피소드처럼 친절하게 가르침을 준 선배도 있었지만, 어떤 선배는 거칠게 행동 지침을 내려주기도 했다.
"머리를 쓰려고 하지 마"라고.
https://brunch.co.kr/@alizwel/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