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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주 Oct 01. 2022

재밌네요. 대본 말고 작가님이요.

대본전쟁: 2.감독편

나는 감독의 마음을 이해한다. 재미없는 대본을 들고 촬영에 나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삶을 재료로 곱게 만든 반죽을 잔뜩 뭉개서 같잖은 덩어리를 빚어내고 그것을 도자기라 이름 붙이는 기분이랄까. 마음에 들지 않는 대본을 들고 촬영장에 선 감독과 제작 프로듀서, 둘 중에 누가 더 깊은 좌절감을 맛볼까. 감독이다. 제작 프로듀서는 그 자리까지 가는데 얼마 걸리지 않지만, 감독은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자리까지 걸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에게는 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감독이 자기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는 데까지 겪어내야 할 시간이 길고 험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덧붙이진 않겠다. 아무튼 고난의 시간을 대략 7년쯤 지나면 드디어 자기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잡는다. 그의 손엔 어떤 대본이 들려있을까. 그가 원하던 대본은 아닐 것이다. 왜일까.


현재 드라마 시장에서 지상파 채널에 방영되는 드라마는 2군이다(이렇게 표현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인생에서 겪은 작품이 모두 2군이었으니 2정도 표현은 써야겠습니다). 1군은 이미 넷플릭스나 다른 채널에서 가져가니까. 그런데 막 연출을 시작하는 감독은 지상파 방송국 소속일 테니 대본의 출발이 이미 2군이다. 더욱이 그의 손에 들려있는 대본은 그나마도 채널로 들어온 대본들 중에 에이스를 선배들이 쏙쏙 골라간 뒤 남은 작품일 확률이 크다. 입봉을 앞둔 지상파 연출자가 대본을 읽을 땐 촬영장에서 겪었던 고난의 시간들이 떠오를 것이다. 절대 이 대본으로 내 작품세계를 시작할 수 없어, 라는 다짐과 함께.


연출가로서 필모를 쌓아간 감독도 크게 다르진 않다. 감독은 작품을 마치고 나면, 그 작품이 필모그래피로 남는다. 감독의 차기작은 이전 필모그래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상파를 떠나고 싶다는 다짐만으로는 어떤 제작사, OTT채널과도 손이 닿지 않는다. 필모그래피가 있어야 그들과 이어진다. 한 작품의 성공, 그 뒤에는 더 유명한 작가, 자신이 원하는 대본을 선택할 수 있는(혹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실패 뒤에는 철저하게 그 반대 선택지가 남는다.


감독은 의사결정권자다. 특히 촬영장에서 중요한 선택은 모두 감독에게 맡겨진다. 대본에 글자로 적혀있는 이야기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가령 대본에 [ 낮, 길거리 - 남녀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마주친다. ] 라는 장면이 있다면, 감독은 1) 어떤 길에서 촬영할지 2)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어떤 분위기로 연출할지 3) 이 장면이 중요한 장면인지 4) 그에 따라 얼마나 길거나 짧게 찍을지 5) 남녀 배우를 어느 각도에서 촬영할지 6) 컷은 몇 개로 나눠서 찍을지 7) 카메라는 고정해서 찍을지 인물을 팔로우하면서 찍을지 8) 조명은 자연광을 쓸지, 반사판을 몇 개나 쓸지 9) 배우의 연기 톤은 밝아야 할지 10) 주변을 거니는 사람은 많은 게 좋을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물론 모든 책임도 감독에게 있다.


대본은 감독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영역이다. 동시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영상의 바탕이다. 감독은 드라마로 시청자의 마음을 울려야 한다. 감독은 영상을 찍으면서 수많은 선택을 내리고, 스태프를 움직이지만 결국엔 대본으로 드라마를 만든다. 감독이 현장에서 기댈 곳은 역설적으로 대본뿐이지 않을까. 감독은 대본을 쉽게 흘려 볼 수 없다. "누가 대본으로 감동시켜달래? 최소한 납득은 시켜줘야 될 거 아니야?" 하던 감독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대본은 감독에게 드라마를 만드는 시작이다. 물론 대본도 선택의 영역에 있다. 감독은 대본이 선택 가능하며, 변화시켜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 작가는 대본을 '완성'으로 생각한다. 감독의 손에 들려있는 대본이 감독의 마음에는 안들지 모르지만 작가에게는 퇴고를 거듭한 완고라는 말이다. 감독은 대본을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작가는 대본을 종착점이라 생각한다. 작가와 감독의 충돌은 대본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정의로 인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어쩌면 대본 내용에 대한 인식 차이는 부수적인 원인일지 모르겠다.


작가와 감독이 대본을 두고 싸울 때 제작 프로듀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된다. 감독과 작가의 의견이 드라마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피드백이 드라마 기획을 해치지 않는지,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지 고민하여 더 합리적인 편에 서서 대본을 이끌어가면 된다. 이상적으로는. 이런 이야기는 프로듀서 스쿨에서 가르쳐줄테니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봐야겠다.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한 상황을 만든다.

제작 프로듀서는 판을 까는 사람이다. 사람을 모아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프로젝트를 끌어간다. 드라마를 만들 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두 사람-작가와 감독-이 판을 깨지 않도록 한 자리에 묶어두는 일이 제작 프로듀서의 일이다.


작가는 감독과의 미팅이 끝나면 깊은 우울과 좌절에 빠져서 "이 작품 못하겠어요. 오늘만 해도 재미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아세요? 저는 정말 그만할래요."라고 한다. 감독은 "작가님은 왜 이렇게 수정을 싫어하시는 거예요? 재미가 없으니까 바꾸자고 하는 건데. 이런 대본을 들고 어떻게 촬영을 나가요." 한다. 제작 프로듀서는 두 떼쟁이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사람이다. 거듭된 싸움에 드라마가 좌초되지 않도록. 작가와 감독이 계속 좋은 선택을 반복할 수 있도록. 결국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제작 프로듀서는 구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묶어두고 계속 스파크를 일으킨다. 전쟁의 포화에서 반짝임을 찾고 그것을 드라마에 넣고는 좋아한다. 결국엔 가장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https://brunch.co.kr/@alizwel/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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