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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주 Oct 09. 2022

저도 참전용사입니다. 깍두기 아닙니다!

대본전쟁: 3.제작프로듀서 편

제작 프로듀서는 크리에이터일까.

프로듀서의 업무는 촬영 전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일단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제작 프로듀서는 두뇌 회로 중에 드라마 내용이나 전개와 관련한 '크리에이티브' 버튼을 OFF 상태로 돌려도 좋다. 드라마 내용에 관한 전권(97% 이상)은 감독과 작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3%를 차지하는 3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작가가 대본 리뷰를 요청하는 경우(대부분 제작팀의 리뷰와 상관없이 극이 진행된다: 0.1%), 감독과 작가의 대본이 산으로 가는 경우(제작 총괄, 최소 제작 팀장이 나서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0.1%), 대본 내용 혹은 감독의 콘티가 제작비를 초과하는 경우(돈 문제에 대해서는 제작팀이 힘을 쓰는 편이다. 돈 문제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촬영을 끝내고 돌아간 회사에 내 자리가 없을 수 있으니까. 역시 목숨을 걸면 못할 일이 없다: 2.8%) 정도 되겠다. 프로듀서라는 이름에 걸맞게 작가들과 대본을 개발하는 호시절이 끝나면, 제작 프로듀서는 현장에서 제작비를 관리하는 지원부서로 변모한다. 그 이유는 제작 프로듀서란 직업의 시작에 있다.


감독님들의 '라떼는: 촬영장 생존기'를 들어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촬영 장소가 섭외되지 않아서 섭외팀과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장소 섭외 힘들지.. 그런데 우리 때는 밤새워 촬영하고 방송국 들어와서, 잠 한숨 못 자고 전화번호부 뒤져가며 장소 섭외했다." 강한 자만 살아남던 시절의 드라마 촬영장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한 감독님은 제작비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내가 조연출 할 시절에는 카드도 안 쓰고 전부 다 현금으로 촬영 진행비를 썼어. 그때 돈으로 이천만원을 내가 전대에 넣어서 차고다녔는데, 그 전대를 밥 먹고 식당에 두고왔다는 거 아니야.-설마 잃어버리신 거예요?- 병주야 그걸 잃어버렸으면 내가 여기 살아있겠니? 선배들한테 죽은 목숨이지." 그 시절 촬영장 이야기는 요즘 촬영은 힘든 것도 아니라는 거친 응원이자, 과거 드라마PD의 역할을 말해주는 전설이다.


과거 드라마PD는 제작자Producer의 역할과 감독Director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주체가 제작사가 아닌, 방송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선배 드라마PD의 연출을 후배들이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제작 프로듀서라는 직업은 드라마 산업이 커짐에 따라 제작사가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사에 판매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만들어졌다. 드라마 연출권은 방송사 드라마PD에게 남기고, 감독의 촬영을 지원하는-말하자면 감독의 후배 드라마PD들이 도맡던-업무가 제작 프로듀서에게 맡겨진 것이다. 촬영 중 제작 프로듀서의 업무가 감독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데 한정된 배경이다. 직업의 출발을 따져보면 제작 프로듀서는 감독의 후배가 하던 일을 일부 수행하는 사람인데, 어디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님 연출에 감놔라 배놔라 하겠는가.


제작 프로듀서도 크리에이터로 살아가는 순간이 있다. 촬영이 없을 때 제작 프로듀서는 다음 작품을 함께할 작가를 찾고, 작가가 구해지면 대본&기획안 작업을 함께한다. 프로젝트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권한은 모두 제작 프로듀서에게 있다. 제작사가 작가와 직접 계약을 하고, 대본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방송사에서 직접 작가와 계약하는 케이스가 워낙 적다보니 제작 프로듀서와 작가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사례는 자체 기획, 제작 조직을 운영하는 SBS(스튜디오S), tvN(스튜디오드래곤), JTBC(SLL)에서나 찾을 수 있겠다.


작품을 시작할 때, 작가와 제작 프로듀서는 파트너 관계로 함께한다. 제작 프로듀서로 일했던 기간 중에, 이 프리 프로덕션 단계가 내가 꿈꿔온 드라마 프로듀서의 일에 가장 가까웠다. 원작 발굴을 위해 영화, 소설, 웹툰 등을 보고 읽는 게 주요 업무이고, 담당하는 작가와 드라마를 기획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라니. 작가님이 레퍼런스를 찾아달라고 요청하면 퇴근 후에도 어떤 영화가 좋을까, 어떤 웹툰이 좋을까 고민하며 웃음이 나올만큼 좋았다. 물론 그 기간은 짧았다. 곧 촬영이 시작되고, 제작 프로듀서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촬영 현장)에 소환된다.


짧게나마 좋은 시절을 맛 본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제작 프로듀서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도 많은데, 프리랜서 제작 프로듀서는 촬영 현장만 뛴다-프리랜서 제작 피디님들 존경합니다. 저는 못해요-. 프리랜서 프로듀서에게 기획 업무를 경험할 기회는 요원하다. 전에 다니던 제작사 대표님의 마인드는 "드라마 하고 싶어서 온 애들인데 기획도 같이 해야지. 그게 회사 입장에서는 돈이 덜 되지만."이었다. 당연하게도 직원들보다 돈을 더 따지는 제작사도 많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프로듀서들이 촬영만 도는 경우도 있다(많다).


ㅅㅍㄱㄷ(슬프게도, 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줄여봤다. 제작 프로듀서의 일을 생각하면 슬픈 게 너무 많은 것도 슬프다), 제작 프로듀서가 대본 전쟁에 참여할 기회는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기획 프로듀서가 드라마 산업 전면에 등장하면서다. 제작 프로듀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2.8%의 승률에도 제작 프로듀서는 대본 전쟁에 뛰어들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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