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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주 Oct 06. 2022

넌 반쪽짜리야, 내가 갖고 싶은

대본 전쟁: 4.기획 프로듀서편

제작 프로듀서가 누렸던(맛보던) 창작자로서의 삶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드라마 산업이 고도로 전문화되면서다. 방송사 드라마PD의 역할이 연출과 제작 프로듀서로 나눠진 것이 드라마 제작의 2세대라고 한다면, 최근에는 3세대라고 불릴 만한 제작 방식이 자리를 잡고있다. 제작 프로듀서나 연출이 수행하던 기획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과 권한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기획 팀장님이 채널을 박차고 나와 회사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라마 기획이 드라마 제작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제작 프로듀서와 기획 프로듀서를 분리해서 채용하는 경향 또한 뚜렷하게 확인된다. 제작사 대표 입장으로 보면 기획 프로듀서는 한정된 작가 풀 내에서 대본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카드다. 일 년의 반 이상을 촬영장에서 보내는 제작 프로듀서와, 대본 개발과 작가 및 원작 발굴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획 프로듀서의 '기획 역량'은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방송사의 문이 한없이 좁은 탓에 똑똑하고 기획력이 좋지만 드라마 산업에 진입하지 못한 인재들도 상시 대기 중이다.


기획 프로듀서는 어떻게 제작 프로듀서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을까.

드라마는 거대한 산업인 동시에, 언제나 역전이 가능한 산업이다. 보통 거대한 산업에는 역전이 없다. 냉장고 하나 잘 만들었다고 작은 기업이 가전 시장의 1위 회사로 도약할 수는 없다. 반면 드라마 한 편으로 무명 배우가 스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한 방'이 터지면 제작사의 운명, 채널의 위상이 달라진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ENA란 낯선 채널을 8주간 시청률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오징어게임>은 한국 드라마 전체를 세계 무대로 끌어올렸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결국 대본이다. 기획 프로듀서의 활약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산업이 작가에 올인하여 대본에 도박을 걸기보다, 대본 개발에 전문화된 인력을 양성하길 선택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제작사와 방송사는 '한 방'을 위해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을 키우고 있다. 기획팀은 작가만큼이나 작품에 깊게 관여하며 기획&대본 개발 작업을 지원한다. 회사는 하나의 작품이라도 더 편성하고, 그 중에 하나라도 텐트폴 드라마로 만들어내기 위해 기획팀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반면 제작 프로듀서가 한 방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루 촬영을 한 방에 엎어버리는 큰 실수(차 잘못 부르기, 대역 못 구하기.. 못 할  있는 한 방은 너무 많다)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기껏해야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네고 정도가 아닐까. 기획 프로듀서의 한 방이 더 크고 강력하다.


드라마 시장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제작 프로듀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대본 기획 개발은 기획 프로듀서와 작가가 전담하고, 편성 이후엔 감독까지 합류하게 되니, 대본과 관련해선 제작 프로듀서의 역할이 더욱 축소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대본과 관련'한 일이 드라마의 핵심이 되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인데, 해당 업무의 권한이 줄어든다고 좋아할 제작 프로듀서는 없을 것이다. 제작팀은 좋은 눈으로 기획팀을 바라보기 어렵다. "촬영 현장도 모르는 너희들이 무슨 드라마를 알아?"라고 외치고 싶지만 촬영 현장을 안다는 것은, 그 현장이 썩 좋지 못한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정도가 전부라는 점에서 그 외침은 공허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 산업은 해를 거듭하며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각각의 직무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경향도 뚜렷해지고 있다. 기획 프로듀서가 전면에 나서는 거대한 흐름은 거스르기 어려워 보인다. 드라마 프로듀서에서 분화한 제작 프로듀서가 산업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기획 프로듀서를 폄하하는 제작 프로듀서는 "기획 프로듀서는 반쪽짜리야."라고 말하는데, 사실 기획 프로듀서가 가져간 그 반쪽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이고, 자신에게 남겨진 반쪽(촬영 현장)은 썩 달갑지 않아서 했던 말이 아닐까. 이런 저런 말들에 제작 프로듀서들의 위기 의식이 엿보이지만, 3세대 제작 방식이 정말 한국 드라마 산업에 정착하게 될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제작 프로듀서가 대본 전쟁에 끼어들 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 제작 프로듀서는 정말 현장직일까? (아직은) 아니다. 제작팀은 전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앞서 말했듯, 제작 프로듀서는 '판을 까는 사람'이다. 제작팀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어떤 감독과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을 가지고 싸우게 만들까, 궁리하는 사람이다. 누가 전쟁에서 이기든, 그 판은 어차피 제작 프로듀서가 마련한 자리다. 그런 점에서 제작 프로듀서란 직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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