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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주 Oct 14. 2022

추억은 하지만, 미화는 하지 않아

잠 못 자는 게 전부면 그만두지도 않았다

우리는 갖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 동경한다. 이미 손에 들고 있는 것의 가치를 자주 잊어버린다. 나도 그렇다.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8시가 넘은 늦은 저녁 시간이었는데 친구는 일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는 길부터 이어진 전화통화는 30분 넘게 이어졌고, 우리 앞에 놓인 식사는 차갑게 식어갔다. 도저히 전화를 끊기 어려운 눈치였고, 나에겐 미안하다며 먼저 먹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일순 마음이 너무 안 좋아져서 잠깐 바람을 쐬고 와야 할 정도였다. 나도 내가 이상하게 보일만큼.


스스로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식사 자리에서 전화하는 것 자체가 화가 나는 걸까?(아니다. 필요하면 전화를 하는 게 당연하다), 함께 보내려고 했던 시간이 방해받아서?(그게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이었나.. 아닌 것 같다), 하필 시켜둔 음식이 짜장면이라서 면이 불어 가는 모습에 화가 났나?(역시 이거였나..) 여러 가지 떠올려보다가 결국 답을 찾았다. 친구가 가진 것-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일, 일에 쏟는 열정 같은 것들 말이다. 드라마를 그만두면서 함께 두고 온 마음에 나는 그렇게 아팠다.


나는 촬영 현장에서 드라마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촬영을 마치고, 작품의 방영과 정산이 모두 끝났을 때도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서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생활을, 삶을, 시간을 갖지 못하고 꿈(사실 꿈의 부스러기에 가까웠지만)을 움켜쥐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드라마를 버리고 내 삶을 선택했다.


촬영을 하는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제대로 쉰 기억이 없다. 촬영을 하거나, 촬영 전후에 처리해야 할 일을 했다. 5시간 넘게 잘 수 있는 날에도 3시간을 넘게 자면 눈이 떠졌다.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와 함께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면 욕을 하며 눈을 떴다. 그곳에 내 인생이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 대척점에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운동을 하고, 긴 잠을 잔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욕심껏 시간을 쓴다. 나는 내 삶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친구의 꿈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길을 잘 걷다가 자동차에 들이 받히기라도 한 것처럼 억울해하면서. 사실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면서 생긴 상처로 아픈 건데도 말이다. 드라마를 만들면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착실하게 모두 겪은 뒤에 선택한 결정을 분명히 기억하면서도 그랬다. 그만큼 나는 드라마와 촬영 현장을, 내 인생의 맨 앞줄에 내 직업과 꿈이 있던 시절을, 사랑했다. 증오했다.


그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 날들에 대한 기억을 이제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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