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프들의 일상을 지키는 일
촬영 현장에서 제작 프로듀서가 챙겨야 할 준비물 백서른마흔다섯가지 중에는 구급약통도 포함된다. 두통약, 소화제, 지사제, 진통제, 파스, 소독약, 밴드, 후시딘, 붕대, 혈액응고제를 가득 채워 준비한다. 약을 살 때마다 약사가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많은 약을 구비해두지만, 약통은 2~3주를 가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낸다. 그만큼 촬영 스태프들은 자주 아프고, 다친다. 비어 있는 구급약통은 촬영 스케줄이 스태프들의 몸 상태를 무시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여름에는 상비약 목록에 포도당 캔디가 포함된다. 촬영이 한창이던 여름날,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병주야 포도당 캔디 없어? 없으면 빨리 하나만 사다 줄래? 좀 급해서.” 나는 포도당 캔디가 뭐냐고 물었고, 그는 대답할 힘도 없다는 듯 약국에 가면 살 수 있다고만 설명했다. 포도당 캔디가 무엇인지는 약국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약사는 “어지러울 때 한 알 씩 드시면 됩니다. 꼭 물을 충분히 섭취하시구요.” 하다가 더운 날에는 그늘에서 쉬어가며 일하라고 덧붙였다. “네”, 라고 대답했지만 내게 캔디를 부탁한 스태프는 얼른 한 알을 입에 넣고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이 고맙다는 인사였다.
열악한 촬영 환경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촬영 스태프의 몸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아프고 다치는 것 말고도 몸은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촬영 스태프 중에는 과체중인 사람이 많다. 일반 사무직에 비해 월등한 활동량이 무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잠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2021년 하반기부터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도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촬영 시간이 정확히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주 52시간 제한이 모든 촬영 스태프의 근무조건을 개선시켜 주지는 않는다. 우선 주 52시간의 기준은 촬영 시간이다. 셋팅과 철수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팀(조명팀, 소품팀 등)은 언제나 촬영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가장 늦게 철수하는데(물론 제작팀 빼고 말이다), 그들의 준비 및 정리시간은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촬영 현장으로 출퇴근하는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데, 촬영이 주로 이뤄지는 세트장은 서울에서 차로 1~2시간 거리인 파주, 양주, 연천 등에 주로 위치한다.
촬영 전후 업무가 많은 팀도 근무 시간을 보장받지 못한다. 연출팀, 제작팀, 섭외팀, 소품팀 등은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 준비로 일을 쉴 수 없다. 그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시간 역시 52시간 근무시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촬영 준비 업무가 없으면 절대 촬영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당 근무시간 제한은 노동자에게 적정 휴식 시간과 수면 시간을 보장하여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이지만, 촬영 현장의 상당수 스태프들은 여전히 쉬지도 못하고 수면 시간도 한참 부족하다. 일부 스태프들에게 52시간 근무제는, 하도급 업체 직원들과 산업안전보건법 만큼이나 동떨어져 있다. 특히 연출팀이나 제작팀은 주당 촬영 시간을 모두 채우면서, 촬영 전후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주당 90~100시간 가까이 일하는 게 보통이다.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호르몬 대사부터 망가지기 시작한다. 식욕조절 호르몬 랩틴의 분비가 감소하고 식욕을 증가시키는 그렐린의 분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잠을 못 자면 많이 먹게 되고, 살이 찌게 된다는 말이다. 음식의 영양보다는 자극적인 맛과 새벽 시간의 배달 가능 여부가 중요한 여건 속에 살아가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촬영 스태프 중 일부-80% 이상도 일부라고 한다면 일부-는 먹는 것에 굉장히 (지켜보고 있자면 괴이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다. 촬영 전 미팅 자리에서 연출팀에게 촬영 중에 원하는 조건이 있냐고 물었을 때, 고민 없이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먹는 것 가지고 터치하지 말자.”는 대답을 들었다. 관례상 연출팀의 식비는 모두 제작사에서 촬영 진행비로 처리해주는데, 나는 그들의 말대로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고 장을 봤다가 50만원이 넘는 영수증을 들고 팀장님에게 불려가 한참 혼이 났다.
촬영이 한창일 때는 그런 모습을 이해할 방법이 식탐이란 단어뿐이었는데, 지금 보면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들은 선택권이 박탈된 촬영 현장에 지쳐 유일한 휴식 시간인 식사 시간에라도 선택권을 보장받길 원한 게 아니었을까. 앞서 말했듯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선택은 감독의 몫이다. 오늘 촬영이 언제 끝나게 될지, 그에 따라 몇 시간이나 쉬고 잘 수 있을지 등의 아주 기본적인 조건도 선택할 수 없다(심지어 예측도 어렵다). 이 생각을 그 때도 할 수 있었더라면, 혼자서 돈까스 하나에 우동과 파스타를 사이드(남들에게는 1인분인 그 음식들을 왜 사이드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로 시켜 먹는 것도, 삼시세끼 끼니 때마다 꽈배기를 봉지 가득 후식으로 먹는 모습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촬영장에서 살이 찌는 것은 몸이 망가지는 정도로 구분해볼 때 귀여운 수준이다. 내 동기는 스트레스로 갑상선이 망가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촬영 중에 손과 발목에 붕대를 한 차례씩 감아야 했다. 열악한 촬영 현장은 우리 몸에 분명한 표식을 남긴다. 섬뜩하게도 그 '열악함'이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스태프들은 생명을 위협 받는다.